술의 양면성을 완벽하게 표현
원래는 <Zone of Interest>를 먼저 다룰 계획이었으나 그전에 최근에 너무나 재밌게 본 영화가 있어 먼저 다루고자 합니다. 바로 <어나더 라운드>입니다. Netflix에도 올라와 있는 작품이고 예전부터 좋은 평을 많이 들었던 터라 찜만 해놓고 계속 보지 못했던 영화인데요. 마침 아내가 메가박스 아트나인 이수점에서 하는 행사를 공유해 줘서 같이 가서 봤습니다. 주기적으로 하는 행사인 듯한데 건물 루프탑에 아트나인이 점유하고 있는 기존 테라스를 반야외 극장처럼 꾸며 영화를 상영하는 시네마테라스 행사이더군요. 행사 컨셉도 괜찮은데 마침 보고 싶었던 영화인지라 단숨에 예약하고 아내와 같이 가서 보고 왔습니다. 가격도 합리적이고 분위기도 좋고 음료와 간식도 포함되어 있어 꽤나 괜찮은 것 같습니다. 독자 분들께도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어나더 라운드>는 덴마크 영화입니다. 그렇다 보니 사실 어나더 라운드라는 제목은 영어 제목을 그대로 한글화 한 것이고 덴마크어의 원제는 <Druk>입니다. 그럼 이 Druk이라는 단어는 뭘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binge drinking, 우리말로 하면 폭음, 한마디로 흔히 때려 마신다고 표현하는 행위를 명사화한 것이죠.
원제의 뉘앙스가 확실히 한 결 더 강렬한 듯합니다.
덴마크 영화인만큼 주연배우 역시 덴마크의 국민 배우 매즈 미켈슨 형님입니다. 우리나라에는 007 <카지노로얄>에서 강렬한 빌런 역할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배우죠.
007 외에도 빌런 역할을 은근 많이 하신 분이라 강렬한 인상이 가장 먼저 연상되는 배우이기는 한데 <어나더 라운드>에서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미켈슨 배우가 맡은 주인공 마르틴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근무하는 역사 선생님입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암시하듯 한 때는 교수가 될 수 있었을 정도로 석학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버린 상태이죠. 미드 <Breaking Bad>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지점이 해당 드라마 주인공 Walter White와 오버랩되는 듯하기도 합니다.
Walter White가 마약 제조와 유통으로 본인의 무료한 삶에 대응했다면 오늘 영화의 주인공 마르틴은 그래도 비교적 건전한(?) 음주로 대응을 합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마르틴은 3명의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닙니다. 모두 같은 학교 선생님들이죠. 한 명은 심리학, 한 명은 체육, 또 다른 한 명은 음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들 중 심리학 교사인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니콜라이는 노르웨이의 심리학자인 핀 스코르데루의 흥미로운 가설을 소개합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기본적으로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부족하다는 거죠. 즉, 혈중 알코올 수치를 0.05%로 유지하면 더욱 자신감이 생기고, 대인관계도 원만해지며 모든 일을 함에 있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는 매우 그럴싸한 가설입니다.
마르틴과 그 무리들은 이 가설을 직접 시험해 보기로 합니다.
학교에서 업무를 하는 도중에도 알코올을 섭취함으로써 혈중 알코올 농도를 0.05%로 유지하고, 실제 어떠한 효과가 일어나는지 한 번 지켜보자는 거죠. 이 설정이 영화 전체의 줄거리의 뼈대 역할을 합니다. 마르틴과 친구들이 이 실험을 감행하는 그 과정과 효과를 영화는 너무나도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동시에 냉소적이고 시니컬하게 그려내죠. 영화의 장르를 흔히들 블랙 코미디로 구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싶습니다.
실험의 초기 결과는 놀랍습니다. 네 친구 모두 직장에서 월등한 효율성 증가를 경험하고, 더 나아가 특히 마르틴의 경우에는 메말라 있던 부인 및 아들들과의 관계도 개선됨을 경험합니다.
마르틴과 친구들은 여기서 멈출 것이 아니라 아예 알코올 섭취량을 좀 더 증가시켜 보기로 하죠. 놀랍게도 영화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알코올 섭취가 증가함에 따라 각자의 삶 또한 그만큼 더 긍정적으로 변하는 효과를 경험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가 대충 짐작하듯이 이 실험의 결말은 다소 처참하죠.
거의 알코올 중독자들이 되기에 이르러서야 친구들은 실험을 중단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실험 말미로 갈수록 알코올 중독성의 위험뿐만 아니라 서서히 다른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도록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영화가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가 새드 엔딩이라고 보기는 어렵게 만드는 최종 결말을 선사합니다.
영화 전반에 배치되어 있는 유머 요소를 걷어내고 보면 영화가 다루는 주체 자체는 상당히 무겁고 슬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영화는 이러한 주제를 너무나도 익살스럽게 잘 표현해 내죠.
10여 년 전에 덴마크 출장을 간 적 있었는데 약 5일 간 보고 경험했던 덴마크는 상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북유럽 하는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죠. 어둡고, 냉소적이고, 차갑고, 재미없는...
덴마크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유쾌하고 장난기도 많고 유머러스했습니다. 출장 일정 중 하루는 스웨덴을 다녀오는 일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스웨덴을 경험하고 나니 덴마크의 밝은 에너지는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같은 북유럽임에도 vibe 자체가 아예 다르더군요.
스웨덴은 흔히들 생각하시는 북유럽의 이미지가 맞습니다.
이는 각국의 리테일 브랜드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요. 스웨덴을 대표하는 브랜드로는 이케아, 볼보 등이 있죠. 무슨 이미지가 연상되시나요? 좋게 말하면 심플하고 깔끔하고 모던하지만 나쁘게 얘기하면 살짝 지루하고 밋밋하다고도 볼 수 있죠. 반면 덴마크 브랜드는 (요구르트 말고...) 뭐가 있을까요? 국내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브랜드로는 Flying Tiger Copenhagen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해당 브랜드 매장을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 컬러풀하고, 아이템들이 귀엽고, 무엇보다 재밌습니다. 장난스러운 아이템들도 꽤 많죠. 전형적인 "덴마크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표현된 성격이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덴마크의 국민성을 나타내는 듯했습니다. 이는 출장 당시에만 느낀 것은 아니고 되돌이켜 보니 어릴 적 학교에서 사귀었던 덴마크 친구들도 대체로 비슷한 캐릭터였던 듯합니다.
영화 얘기로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어나더 라운드>는 상영시간 내내 웬만한 서양 술이란 술은 다 나옵니다. 맥주를 기본으로 해서 보드카, 와인, 위스키, 버번, 압생트 등등... 주당이신 분들에게는 술 고프게 하는 장면들의 향연이죠. 그런 와중에 영화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술... 어디까지가 촉진제이고 어디서부터 독약이 되는 것일까...?"
어려운 질문이고 개개인마다 편차가 분명 존재하죠.
다만, 제가 느끼기에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다음과 같았던 것 같습니다.
"만만치 않은 인생살이... 그래도 (적당한 양의) 술이 있어 조금은 즐겁고 대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불금이네요. 독자 분들도 안전하고 건강한(?) 음주를 통해 인생의 활력을 느끼는 주말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Till nex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