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은계란 Jun 28. 2019

14. 예고 없이 찾아온 거센 폭풍우

크리스마스를 앞둔, 2016년의 끝자락, 겨울은 내게 말했다. 2016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기대하던 월요일 플로리다에서의 겨울 여행을 앞두고, 생각지 못한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 이십여 년 넘는 삶 속에서 가장 끔찍한 날들이 아니었나 싶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까 차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당시 난 CPT라는 학교에서 승인한 비자의 형태로 대학교에서 금요일 오후, 토요일이면 수업을 하루 종일 들으며, 평일에는 학교 선생님으로 풀타임 일을 하고 있었다. 나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일을 했었고, 아무 문제도 없었기에,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가을학기가 끝나는 시점에, 정말 하루아침에 더 이상 비자를 줄 수 없으니 새로운 학기의 시작하는 날로 2주 안에 미국에서 나가라고 했다. 세상에 그런 날벼락이 있구나를 20대 초중반 느껴보았다. 미국에서의 1년 넘는 삶을 정리하는데 겨우 2주라니, 집이며 차며,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울고, 또 울었던지 그때의 기억을 되돌리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집에는 온통 빨간딱지가 붙어있는 듯 괴로웠으며 감당하기 힘들었었다. 무엇을 하든 눈물이 났고, 어떻게 무엇보다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무리 찾고 찾아도 길은 없었으며, 애원하고 또 애원해도 답은 오지 않았었다. 보이는 것은 두 가지밖에 옵션뿐이었다. 하나는 한국행이었다.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는구나.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울고 또 울어도 울음밖에 나오지 않았고, 참 서러웠다. 이런 마음으로 플로리다에 가는 게 맞는지 수천 번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 갈 것 같아서 일단 가기로 마음은 먹었다. 지금 이 순간이 미국에서의 나의 삶의 끝이라면, 마지막 여행은 기억 속에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니까 말이다. 또 하나는 당시 같은 상황을 겪었던 사람들과 함께 조금의 정리의 시간을 갖고자 다른 기관으로 학생 신분을 옮기는 것이다.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학원 등록을 결정을 했고, 그 과정도 몇십만 원의 돈과 시험 성적, 재정증명을 하는 등 돈과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고, 어떻게 그런 일들이 내게 벌어졌을까 싶다. 박사 종합시험에 떨어지면 간혹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삶은 그렇게 바뀌고는 한다는 것을 어쩌면 처음으로 알고, 배웠을 수도 있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싶어서 흔들리겠는가 바람이 부니까 흔들리지. 참 끔찍한 시간들을 견디고 견뎌 여기까지 온 것이었는데, 참 허망했다. 





올랜도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너무 멋있었다. 2007년 도쿄의 디즈니랜드가 떠올랐고, 2013년의 싱가포르의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생각났다. 너무나 행복해야만 한 여행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하루빨리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고, 돌아오자마자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뛰고 또 뛰었다. 주변의 여러 기관에 연락하여 CPT의 가능성을 미팅하기도 했고, 학교에서는 인수인계 등 여러 가지의 일이 겹쳤다. 그때, 참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전화하고 또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일을 할 수 있다고 명시한 마지막 날,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Today is the last day. I am sorry, but I have no choice. I look forward to seeing you again." 1교시 아이들은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안녕을 고했다. 그렇게 작별의 시간을 만들고 있던 8교시쯤, 몇 천 불의 수업료를 올려 받은 다음 다시 CPT를 준다는 메일을 받았다. 4주 동안 그렇게 피를 말리더니 결국은 다시 CPT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선택은 없었고, 계약기간까지는 꼭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난 5월 2일까지의 CPT를 받았고, 그때는 6월 말까지 연장될 수 있다는 말을 했었고, I-20에도 적혀있었다. 피 말리는 4주였으나, 정말 거센 비바람과 함께 모든 것이 원래 자리대로 잔잔하게 돌아왔다. 만약에 그때, 먼 훗날 이렇게 하루아침에 피 말리는 일이 한 번 더 있을 줄 알았다면 난 지난겨울 이 미국의 인연을 잘라버렸을 텐데, 그때 나는 내가 겪을 또 한 번의 폭풍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2017년 하고도 1월 중순이 되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고, 뭔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To be continued...

작가의 이전글 13. 비웠을 때 채워지는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