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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pago May 06. 2022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 … 혁명가의 나라, 쿠바

쿠바 - 페소 Peso

화폐 수집가가 혼자서 각국 화폐를 모으기는 힘든 일이다. 필자는 잦은 해외 출장과 국제행사 참여로 이미 다양한 외국 화폐를 모았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해외에 간 친구들에게 해당국의 화폐를 부탁하곤 한다. 쿠바 화폐 수집도 그랬다. 쿠바 여행을 떠난 필자의 친구인 배우 고우리 씨를 통해 단위별로 화폐를 수집할 수 있었다.

쿠바는 정통 공산권 국가로 지금까지 활발한 외교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쿠바의 화폐는 매우 귀하다. 물론 몇 년 전 쿠바는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과 외교를 정상화했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나라다. 현재 쿠바에서는 두 가지 화폐가 사용된다. 하나는 일반 시민들이 사용하는 쿠바 페소(CUP)이고, 다른 하나는 쿠바에 온 관광객들이 사용하는 쿠바 태환 페소(CUC)다.

이번에 친구로부터 건네받은 화폐들은 쿠바 페소가 아닌 쿠바 태환 페소였다. 이번 호에서 쿠바 태환 페소를 통해 쿠바가 어떻게 공산화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남게 되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스페인은 대항해 시대를 열고 대부분의 중앙아메리카와 남미 전체를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으로 자극받은 남미 식민지들이 독립선언을 하게 되자 1800년 직전 남미의 실력자로 군림했던 스페인은 20년 만에 쿠바를 제외한 남미 지역에서 쫓겨나게 된다. 쿠바도 100페소 뒷면 인물,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를 통해 독립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국부 세스페데스 ()로 지어 독립 노래한 마르티

세스페데스는 역대 쿠바 혁명가들 중 최고로 추앙 받는 인물이자 국부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비밀결사 ‘부에나페’를 결성하고 37명의 동지들과 함께 1868년 10월 10일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해방시켜 147명의 반군을 조직, 제1차 쿠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1년 후인 1869년 세스페데스는 쿠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독립전쟁 과정에서 스페인 군에 발견돼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10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1차 쿠바 독립전쟁은 1878년 스페인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10 쿠바 태환 페소(CUC)

이후 쿠바는 다시 독립의 길에 나선다. 이번에 쿠바 독립을 이끈 주인공은 10페소 앞면 인물 호세 마르티였다. 일찍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반(反)스페인 전선에 나선 그는 17살에 체포되어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다. 스페인 정치범수용소에서 6년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멕시코로 간 마르티는 이곳에서 독립을 주제로 한 문학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마르티의 시(詩)는 쿠바뿐만 아니라 남미 근대 문학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25살 되던 해에 선포된 일반사면으로 고향인 쿠바로 귀국한 마르티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후 여러 정치적 압박에 직면하게 되고 그는 미국과 베네수엘라를 오가며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마르티의 시나 글을 접하고 감응한 쿠바 청년들은 독립투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1895년에 마침내 제2차 쿠바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마르티는 곧바로 쿠바로 귀국해 독립을 위해 자원한 청년들과 합심해서 싸웠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마르티는 1896년 스페인 군에 살해 당해 생전에 독립의 날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터뜨린 자유의 불꽃은 1898년 마침내 쿠바의 독립을 완성하게 된다.

사실 군사적으로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쿠바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에서 언론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덕분에 미국인들은 쿠바 독립전쟁에서 반군을 지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스페인은 쿠바 독립전쟁에 개입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쿠바 독립전쟁은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으로 번졌다. 하지만 여기에서 스페인이 패배함으로써 쿠바는 필리핀과 함께 독립을 쟁취했고 푸에르토리코는 미국 영토가 된다.

한편 미국의 지지로 독립한 쿠바는 반대급부로 이후 미국의 내정간섭을 받게 된다. 이는 쿠바 내에서 불만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반미 감정을 고조시켰다. 사회적으로 증폭된 반미 감정은 점차 쿠바 사회를 사회주의 이념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마침내 체제 변화을 위해 하나의 세력이 발기한다. 이 세력의 주요 인물 두 명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3페소 앞면의 인물인 체 게바라다.

독립 향한 열정은 국적을 넘어선다, 체 게바라

사실 체 게바라는 쿠바가 아닌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고향의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던 의대생이었다. 그는 재학 시절 떠난 여행에서 남미 지역 주민들의 열악한 생활을 보고 사회주의 이념에 빠지게 된다. 체 게바라는 남미 국가들이 현재 당면한 문제는 남미 지역 전체의 혁명 노선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변혁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이후 1953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과테말라로 건너가게 된다. 그 당시 과테말라는 진보 정권이 집권 중이었기 때문에 남미 공산주의자들은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렇게 1955년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과 친분을 쌓게 되고, 1956년에 발발한 쿠바 혁명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체 게바라는 1959년까지 게릴라전에서 의사와 병사로 활동했고 쿠바에 사회주의 체제가 선포되자 자동적으로 쿠바 시민이 되었다. 얼마간 고위급 관료로도 활동하였던 체 게바라는 1964년 ‘쿠바 혁명’의 성공을 전파하기 위해 쿠바를 떠났지만 콩고에서 실패를 경험하였고 다시 볼리비아로 떠나 정부 군과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결국 사망했다. 지금도 쿠바라고 하면 국부인 세스페데스나 카스트로보다 쿠바 출신이 아닌 체 게바라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는 국가의 독립을 향한 열정은 국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역사에 분명히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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