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pago May 05. 2022

아프리카 대륙의 운명이 담겨 있는 케냐 화폐

케냐 - 실링  Shilling

필자는 이 글을 쓸 때 2019년 1월 중동 출장 중이었다. 카이로에서 아시아기자협회 행사를 하기 위해서 두바이를 경유한 아미레이트 항공사를 타고 한국을 떠났다. 두바이에서 카이로행 비행기에 탈 때 제 좌석 옆에 아프리카 특히 케냐에서 오랫동안 자원 봉사활동을 한 미국 사람이 앉아있었다. 서로 인사하고 자기 소개하다가, 미국인 친구가 필자가 이러한 화폐 글을 쓴다는 것을 듣고, 가지고 있는 케냐 화페를 선물로 주었다. 필자도 받은 화폐 계기로 케냐의 역사로 시간여행을 했다.

케냐의 화폐 단위는 실링이고, 50실링 뒷면에는 상징적인 그림이 담겨 있다. 몸바사에 있는 코끼리 엄니 동상과 낙타 카라반이 보인다. 보통 낙타 카라반이 아랍 지역을 상징한 것인데, 케냐와 무슨 상관일까? 바로 이 질문부터 케냐의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가 시작한다. 

케냐의 역사를 알려면 타자니아와 오만 역사를 알아야 한다. 17세기초기부터 1749년까지 야루바 가문이 술탄이라는 명칭으로 오만을 다스리고 있었다. 오만이 아프리카에서 팽창하여 오늘 날에 탄자니아에 있는 잔지바르 섬으로 중심으로 삼아서 동아프리카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오만에서 내전과 이란의 침략이 일어나자 알 사이드 가문이 부상해서 외세 침략을 없애고 오만의 정권을 얻었다. 이 가문이 아직도 오늘 날의 오만의 술탄이 속한 가문이다. 

알 사이드 가문이 포르투갈 침략을 당해서 수도를 참시 아프리카 영토의 잔지바르로 욺긴 적도 있었다. 물론 다음에 포르투갈을 자기네 나라에게 쫓아냈다. 그러나 다음에 더 큰 문제를 대면하게 되었다. 알 사이드 가문이 거의 내전 직전인 왕자의 난에 휩싸였다. 이 때 왕자난이 1856년에 술탄국 분단으로 마무리 되었다. 전직 술탄의 큰 아들이 오만에서, 작은 아들이 아프리카 영토에서 즉위하면서 이 문제가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이 계기로 잔지바르 술탄국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이 잔지바르 술탄국의 핵심적인 도시 중에 하나는 몸바사이었다. 

잔지바르 술탄국은 다른 아프리카 군주국들에 비해 문명적으로 앞서 가고 때로는 서구 열강을 이긴 적이 있어도, 19세기 이후로부터 밀리기가 시작했다. 제국주의 서구 열강 중에 특히 포르투갈과 많이 싸운 잔지바르 술탄국은 결국 대영 제국 동아프리카 회사와 인연이 겹쳤다. 잔지바르 술탄국이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고, 가지고 있는 몸바사를 1890년 초기에 자기 영토에서 빼앗겨서 영국이 그 지역에서 세운 동아프리카 보호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동아프리카 보호국이 1920년에 ‘케냐 식민지 보호국’으로 개명을 하면서 수도를 몸바사에서 나이로비로 옮겼다. 그래서 몸바사는 사실상 케냐의 초대 수도이고, 지금 도 무역 중심 허브로 뉴요크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잔지바르 술탄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1964년에 혁명이 일어나서 술탄이 하야하고 탄자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다시 케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 날 친구한테 받은 돈이 100실링이었다. 50실링부터 1000실링까지 모두 화폐 앞면에 같은 사람의 초상화가 있다. 바로 케냐의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이다. 케냐타는 아프리카의 탈식민지 시기에 상징적인 몇 명 아프리카 지도자 중에 한 명이다. 아프리카의 식민지 연구를 하는 그 누구도 그의 명언을 잘 안다. “"선교사들이 처음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에게는 땅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눈을 감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 땅은 그들의 것이 되어 있었고 성경은 우리 손에 들려 있었다.”

아프리키에서 식민지 시대가 2차대전 이후로부터 잇따라 붕괴하였다. 단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한다고 해서 거주민의 삶 수준이 올라갔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부 나라에 학살이나 내전 때문에 더 큰 재앙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일 일반적인 모습이 나라를 독립 시켜준 초대 대통령이 무자비한 학살을 가해 나라 역사에 악명을 남겼다는 것이다.

조모 케냐타는 이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단은 그는 처음에 독립 운동에 시작한 정당인 케냐 오프리카 연맹(Kenya African Union, KAU)은 다른 독립단체들처럼 폭력으로 독립을 치향한 것이 아니었다. 1944년에 생긴 정당에 1947년에 케냐타가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부터 케냐에서 폭력을 행사하명서 독립운동을 한 크고 작은 무장단체들이 생겼다. 아무리 케냐타가 KAU를 이 단체들과 거리를 만들거 비폭력 연설을 했어도, 영국 정부 그를 기소해서 7년 징형을 주었다. 케냐타의 그 명언이 바로 7년 징형 판결을 받았을 때 법정에서 한 말이다.

케냐타는 1960년에 다시 석방되었고,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같이 독립활동했던 친구들이케냐 아프리카 국민 연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 KANU)을 창당했다. 석방되자마자 이 정당의 총재로 선출된 케냐타는 1963년에 자치권을 1964년에 독립은 획득했다.

케냐의 탄생에 대해서 이 정도 요약을 마무리하고 하나의 꿀조언을 알려 드리고 싶다. 100 실링 뒷면을 보면, 케냐타의 동상과 바로 옆에 하나의 고층 건물이 보인다. 그 고층 건물은 케냐타 국제 컨벤션 센터(KICC)이다. KICC은 1974년에 완공이 되었을 때 그 당시에 케냐에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케냐에서 주최된 수 많은 국제 행사의 장소가 되었던 이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이 역대 최초의 케냐 출신 건축가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황금기를 꿈꾸다 … 흑해의 신생국, 조지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