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아르바이트 차량에 고단한 몸을 싣고 그보다 더 나이 든 사람들도 새벽부터 지하철을 탄다. 그들의 졸음 가득한, 혼몽하고 흐릿한 눈동자 속에 이따금씩 번뜩이는 생의 의지. 머지않아 해소되지 않은 어제의 피로와 하루치의 걱정에 휘말려 사라져 버릴.
옛 친구를 만났다. 아주 오래간만에.
친구는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동료들이 얼마나 남다른 애사심을 가지고 회사에 헌신하는지, 또 자신이 최근 만나고 있는 사람이 '괜찮은 현대인'의 기준에 얼마나 부합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커피잔에 맺힌 물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오늘은 어떤 길로 집에 돌아갈지,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생각한다.
너는 어떻게 지내? 나의 긴 침묵에 종지부를 찍는 친구에게 나는 조만간 다닌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직장을 관둘지도 모른다는 말 대신, 내가 얼마나 적적한지 또 얼마나 슬픈지에 대해 토로하는 대신 날씨가 선선하니 조금 걷자고 말한다.
모두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2년 전까지만해도 누구보다 가까웠으나 이젠 단골 카페의 주인보다 먼 관계가 되어버린 후배는 자유로운 생활을 청산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일본인 친구는 대학교 졸업 시험에 무사통과했다는 소식을 SNS로 전해왔고, 연애가 인생의 낙인 친구는 매일같이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길 반복하면서 가짜 속의 진짜를 찾아헤맨다. 이주 전 심은 해바라기 씨앗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자라나는 중이고 자주 가던 카페는 돌연 와인바로 바뀌었다. 나는 다만 창밖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바라보듯 고요와 정체 속에 앉아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네가 내일의 장바구니를 걱정하고 좀 더 나은 복지를 위해 이력서를 갱신할 때, 나는 내 정신의 이력에 밑줄을 그으면서 커피 두 잔에 이어 한 잔을 더 마실지 아니면 그냥 잠자리에 들지 고민한다. 오늘 하루 커피 한 잔을 더 마신다고 한들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잠드는 새벽을 감당하게 될 뿐, 나의 인생에는 그 이상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결핍되어 있고 허무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놓인 것처럼 빈 잔을 앞에 두고 신중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정작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버릴 변화의 목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스쳐 지나간다.
네가 잘 되어서 기뻐.
나는 네가 날것을 좋아하지 않고, 퇴근길엔 한강 도로변을 달리면서 울적해한다는 걸 알아.
그럴 때 통화할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그런데 너는 내가 누군가에게 무작정 전활 걸고 싶을 때,
공연히 누군가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니.
친구에게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말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 위에 물 위의 꽃잎처럼 띄워진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것들은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흔적 없이 사라질 것임을 안다. 또 나는 네게 아무렇지 않은 척 어제 본 영화 얘기를 떠들어대리란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