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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Feb 11. 2022

어쩌면 내 구원자, MBTI

고마워, 나를 단 네 글자로 설명할 수 있게 해 줘서

MBTI 성격 유형을 처음 알게 된 건 2017년 즈음이었지만, 그때는 단순히 성격 유형 검사겠거니 하고 넘겼었다. 그러다 재작년부터 MBTI 열풍이 돌았다. 관련 밈이 쏟아지고 심지어는 자기소개를 MBTI로 하기도 했다. 혹자는 혈액형별 성격 테스트처럼 믿거나 말거나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MBTI는 그렇게 비과학적인 성격 유형 검사는 아니다. 물론 심리 측정도구로서의 MBTI가 유효성이나 신뢰성 등에서 비판을 받은 면도 있기는 하지만. 


MBTI는 온라인에서 무료로 검사해볼 수 있는데, 신뢰도가 낮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격 유형을 쉽게 파악할 수는 있었다. MBTI가 자기소개의 한 수단으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자, 열여섯 개의 성격 유형에 대한 분석 콘텐츠도 쏟아졌다. 그리고 미디어는 '왜 2030은 MBTI에 열광하는가'를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랜만에 지인들과 모였을 때, 심리학이나 성격 유형 테스트에는 전혀 관심 없어 보였던 한 친구가 '너희 MBTI가 뭐야?'라고 물었고, 더러는 즉각 자신의 MBTI 유형을 말해주었다. 정말 열풍은 열풍이었다.


MBTI 열풍에 나는 너무나 감사하다. 세상에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머저리가, 정녕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INFJ-T 유형이다. 몇 년 전이나 최근이나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 열풍으로 지인들의 성격 유형을 알게 되었는데, 지인의 대부분은 외향형이고 INFJ는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속한 어느 집단에서도 INFJ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한때 내 좌우명은 '제발 내면 말고 바깥세상일에 관심을 갖자'였다. 10대부터 20대 전부를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데만 썼다. 내 가치관, 신념, 단순한 생각부터 복잡한 생각까지 내면에만 관심을 갖고 고민을 이어가는 내가 너무 답답했고 한심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잘하는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것 같다. 외향인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춰 나를 색칠하고 덧칠하고 뒤집어 놓고, 그렇게, 그렇게 보냈다. 굳이 맞지도 않는 전공을 선택해서 또 맞지도 않는 직업을 가지고 곤욕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제발 생각 없이 일만 했으면 좋겠다가도 꼭 스멀스멀 생각이 피어올라 고통스러웠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이게 내 가치관과 맞는 일일까?"


INFJ의 특징이 그렇다. 가치관과 신념이 확고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예민하고 섬세하다. 확고하면서 배려하다니 일단 특징 자체가 모순 덩어리인데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언제나 뚝딱거린다. 이 "뚝딱거린다"는 말도 INFJ를 설명하는 밈 중에 있던 말이다. 기가 막힌 표현이다. 사람들 사이에 선 내 모습이 너무 답답했는데 이 단어 하나로 그동안의 진땀들이 다 설명된다.


이십 대를 다 그렇게 보내고 나 자신과 상황을 모두 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게 하기도 했다. 나에게 영영 벌을 주는 의미에서. 그러다 INFJ 관련 콘텐츠를 하나 둘 보게 됐고, 그에 공감하는 '인프제' 유형의 사람들을 보면서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물론 온라인을 통해서만. 이 유형의 사람들은 주변에 정말 없다. 일단 INFJ인 내가 주변에 사람을 많이 두지 않기 때문에 마주칠 확률 자체가 낮다^^ 


MBTI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인프제'의 특징들을 보면 그동안 내가 고민하고 부딪쳐왔던 일들이 "내가 이상해서" 생긴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오래 참다가 결국 도어 슬램 해버린 일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이직을 거듭하던 일도, 우울감에 빠져 지내던 일도. 내가 이상했던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잘 몰라서"였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인프제 관련 콘텐츠 댓글에는 정말 내가 쓴 것 같은 내용의 글들이 많다. 물론 나처럼 MBTI 열풍에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담이지만...콘텐츠 양을 봐도 E유형보다는 I유형 분석 콘텐츠가 더 많더라. 자신의 성격에 관심 많은 내향인들ㅠ)

 

INFJ의 숙명은 고민인데, 그중 가장 큰 고민은 진로 고민이 되시겠다. 나 역시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나 자신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크게 엮이지는 않지만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 여전히 어렵다. 정말 다행히 멋진 인프제 유형의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하는 인프제를 위해 성실히 콘텐츠를 만들어주고 있다.  * Diana Lee 님의 인프제 진로 관련 콘텐츠 https://youtu.be/Gi20fQTL730 


웃긴 말이지만 MBTI 덕분에 이제는 외롭지 않다.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들이 생긴 것 같아 든든하기까지 하다. 일단 내 성격이 열여섯 가지 유형 중 한 가지 유형일 뿐이라는 사실이, 질병 같은 게 아니고 한낱 유형일 뿐이라는 소중한 사실이, 매우 감사하다. 이런 것으로도 매우 감사할 만큼 사는 데 불편했다는 뜻이다. 예민함 때문에 여전히 불편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힘이 난다. 


덧. 

INFJ와 천생연분인 성격 유형은 ENFP라고 한다(MBTI 열풍과 더불어 MBTI 궁합도 열풍이었더랬다). 공교롭게도, 또 다행히도(!) 남편의 성격유형이 엔프피이다. '인간 댕댕이 유형'이라는 엔프피. 그래서일까, 고민을 거듭하며 어두운 생각에 빠질 때마다 남편 덕을 톡톡히 본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재간둥이 엔프피. 너무나 닮고 싶은 성격이지만 절대 닮을 수 없겠지...또륵


나를 망치고 또 나를 구원해주는 너, INFJ... 앞으로 잘 지내보자...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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