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가 중요해진 스킨케어 루틴
피부는 타고난 게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내가 좋은 피부를 타고났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막쓴 것에 대배 지금까지 잘 버텨준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유전자라 봐야겠다. 얼굴에 여드름이라곤 대학교 2학년 때 잠깐 심하게 나고 사라진 게 전부고, 그 뒤로는 밝은 피부톤에 빤질빤질한 광이 나는 피부였다. 피부도 나에게 별 불만이 없었는지 특별한 케어를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한 2년 전부터 크림을 발라도 얘가 문을 닫아 토해내는지 꺼슬꺼슬하고 칙칙한 피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선크림 바르면 다 되는 줄 알고 대충 선크림 바르고 햇빛 좀비로 살아온 지 어언 6년이 넘었으니 피부도 이렇게 파업을 할 시기가 되긴 됐다. 눈가 주름은 아직 덜한데 노무현 이마 주름이 생기려는 거 같아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눈썹을 올려 들어 이마를 찌푸린 채 경청하는 버릇을 먼저 없애야 하겠지만.
메이크업엔 그렇게 큰 성의와 관심이 없었어도 피부는 좋길 바랐는데, 이제 피부도 성의를 보여야 좋을 수 있다니 오랜만에 느낀, 나이로부터의 배신이다. 그래서 이번에 한국에 다녀온 김에 스킨케어 루틴을 완전히 바꿨다. 원래는 오일이 살짝 섞인 클렌징 워터로 화장을 지우고 클렌징 폼을 썼다면, 이제는 클렌징 오일로 화장을 했건 안 했건 저녁 세안을 한다. 예전엔 끈덕거리고 강한 느낌이 싫어서 클렌징 오일을 안 썼었는데 막상 써보니 좋다. 외국 브랜드에서 나오는 것들은 피부에 안 맞아서 시도했다 친구 준 적이 많았는데, 이번에 한국에서 사 온 민감성 피부용은 그렇게 오일 느낌이 심하지 않아 잘 쓰고 있다. 그리고선 클렌징 젤로 다시 한번 세안을 한다. 그동안 기름은 없는데 건조해서 각질이 생긴 건데 관리를 잘 안 해줬던 탓인 걸로. 그러고 나서 스킨으로 닦아내고 흔히 말하는 콧물 발효 에센스를 대충 바르고 리페어에 좋다는 에센스를 또 바른다. 그리고선 아이크림을 바르고 다른 걸 좀 하다가 돌아와서는 저녁용 크림을 바른다. 이것도 리페어에 좋단다. 그리고 가습기를 틀어놓고 잔다. 자는 방의 습도가 매번 30% 수준이더라고. 55%가 목표지만 그러려면 물을 끼어 얹는 수준이어야 해서 매번 45%인 상태에서 일어나 가습기를 끈다. 그래도 30보단 45지!
그렇게 2주 정도 하니 피부가 예전 정도는 아니어도 윤이 난다. 피부가 내게 기대하는 수준이 워낙 낮았어서 이 정도 성의로 반응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두피 케어도 친구들 말대로 실리콘 브러시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확실히 더 나은 것 같다. 예전에 샤워를 하면 30분씩 걸리는 친구들이 이해가 안 됐었는데, 지금 보니 5분 내에 끝내는 내가 피부에 너무 무관심했던 거였다.
나한테는 '뭘 또 그렇게까지'의 영역들이 몇 개 있는데 피부관리가 그중 하나였다. 물론 한국에 살았다면 피부과나 에스테틱에 외주를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환경이 못 되니 시간이 많은 내가 스스로 셀프케어를 하는 방법을 택했다. 내가 지금은 필요 없다고, 과하다고 느끼는 영역들이 스킨케어처럼 언젠가 나의 필요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이 올 때 겸허하게 내 오만함을 인정하며 빨리 수긍하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미 늦었어 하고 방치하지 말고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물론 너무너무 좋겠지만, 이제는 건강하게 보이는 게 더 중요해졌다. 아, 말할 필요도 없이 건강한 게 제일 중요하다. 한국에서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다가 우연찮게 길거리에서 본 전 회사 남자 임원들 이야기하면서 "그분들 머리 엄청 하얘졌더라"라고 이야기했더니, "요즘 흰머리는 패션 아이템이야"라고 친구가 한 답이 오래 뇌리에 남았다. 사실 흰머리가 육체노동을 하는 분들에게는 나이 들어 건강한 노동력으로 보이지 않아 숨겨야 하는 존재라고 들었는데, 누군가에게는 패션 아이템이라니 특히 남자들한테는 럭셔리 템이라니. 그리고선 아름답게 보이는 것보다 건강하게 보이는 게 나의 레벨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나도 어떤 버블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는데... 여기까지 가기에 내 피부관리라는 소재가 너무 하찮기 때문에, 정신 차릴 겸 물이나 한 잔 마시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