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절약
러시아에서 오는 가스 이야기가 아니고, 내 안의 에너지 이야기다. 실은 10-11번째 주를 쓰다가 말았는데, 나중에 다시 써야지 하고선 벌써 다음 주기가 돌아와 버려서 또 이렇게 합쳐버렸다. 사유라고 한다면 주중 저녁 세 시간씩 두 번 가는 독일어 수업이 3월 초부터 시작한 걸 말해야겠다. 업무 시작을 일찍 하는데도 5시에 종료하려면 이것저것 마음이 바쁘다. 특히 미국에 있는 팀과 협의해야 하는 업무들이 꾸준히 있어 미팅이나 메일이 4시 넘어 있으면 쉽게 뇌가 업무 종료 버튼을 못 누르는 탓이다. 그러고 나서 배를 대충 채우고 집을 나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나 같이 지친 몸과 머리를 이끌고 온 다른 직장인 학생들이 있는 교실에 도착한다. 낮은 레벨이 아님에도 다들 100% 커밋먼트가 없기 때문에 매번 전 단계에서 배우고 왔어야 하는 문법을 다시 설명하는 선생님들에게서도 매너리즘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 그리고 의무적으로 바깥바람을 쐬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연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 이 두 이유 때문에 이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내가 독일어를 하게 되면 거의 새로운 차원으로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에 독일어는 잘하는 게 무조건 득이다. 내가 다른 업무용 자기 계발을 하는 것보다 거의 5배는 효과적이랄까.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 독일어 공부를 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는 그냥 이제 못 알아듣고 못 말하는 게 지겨워서다.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우리 언어는 이렇게 어렵지, 하며 뻐기는 게 이제 꼴 보기 싫어서이기도 한데, 이렇게 부정적인 동기도 동기는 동기이므로 이용해 보는 중이다.
얼마 전에 집에 이것저것 해결할 일이 있어 전에 불렀던 수리공에게 연락해 일을 부탁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독일어가 지금보다 훨씬 별로일 때 부엌을 설치하면서 만난 사람이라 독일어가 많이 늘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 사람도 외국인인데, 한참 일이 끝나가니 "좀 지내보니 독일 어때?"라고 물어, 한숨을 쉬며 "그냥 그냥 괜찮아, 근데, "라고 하자마자 "사람들!"이라고 찌찌뽕 모먼트를 만났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잘 모르는 부분을 열어두지 않고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믿음, 잘된 부분보다는 흠만 찾아내려는 자세 때문에 이 사람들을 마냥 마음속 문을 활짝 열어놓고 대할 수 없다. 이게 내가 외국인이고 여자여서 그런 건가 생각하다가도 이건 뭐 만인의 만인을 향한 공격이라, 무슨 감정적인 평을 듣든 "ㅈㄲ, 내 말이 맞아"의 자세를 고수하며 밀고 나가지 않으면 무언가를 추진해내기 힘들다. 나도 내가 싫어하는 모습의 사람으로 변하지 않으면 일을 잘 해내기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다. 이러다 보니 내가 약자의 위치가 될 수밖에 없는 독일어 사용의 환경에 놓이기 싫은 마음도 한 켠에 있는 거다. 그리고 이 언어와 문화가 함께 가져오는 부정적인 성격으로의 변화도 두려운 탓이다. 아무튼 이런 마음속 부정적 동기와 배움을 저해하는 부정적 변화에의 저항이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탓. 이러한 환경에 내가 노출된 건 드디어 내가 하는 업무가 결실을 맺기 시작했고 영역표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격이 시작되어서다. 상사에게 지금 환경이 너무 불필요하게 정치적인 것 같다고 표현했고, 상사는 나에게 스스로 해결해볼 것을 권했다. 내가 알아서 업무 거절을 할 때 응원해주고 갈등이 생길 때 날을 세울 때 긍정적 피드백을 주는 걸 보면 내 상사는 내가 더 쌈닭이 되길 기대하는 것 같고, 그게 그가 말하는 다음 단계에서 갖춰져야 할 자질이라는 게 확실해지면서, 그냥 어디서 연구개발이나 하고 싶은 마음도 같이 자랐다. 나는 그냥 말이 되는 일을 즐겁게 잘하고 싶은 건데...
없는 에너지를 잘 쓰기 위해 우선순위를 정하고 최적의 솔루션을 찾아가는 문제해결방식의 기본을 내 삶에도 적용해보면서, 즐거움이라는 영역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 같이 어떤 의무도 피곤함도 섞이지 않은 언어를 취미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즐거움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냥 지금 내가 지친 탓이고 환경이 혹독한 탓이다. 의무와 명령, 강제를 정말 정말 싫어하는 성격인데, 이런 환경에서 배움을 지속해야 하니 이게 이렇게 피곤하지 뭐. 미국에 살며 영어로 일하며 살아가는 분들도 나름대로의 백래쉬와 이런 피곤함에 노출되는 걸 보면, 내가 한국에서 한국어를 쓰며 살지 않는 한 이건 내가 가져가야 하는 짐의 무게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Again, 그럼 어디서 즐거움을 찾아야 하나.
지난 4주 동안 좋은 작품들도 많이 접했고, 주말여행도 다녀왔고,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여름 드레스도 입었고, 눈이 온 발코니도 청소했다. 운동 루틴도 막 시작했다가 폴렌에 여전히 찬 공기에 천식이 심해져서 잠시 쉬는 중이다. 만날 때마다 가까워지는 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고,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두 발자국 멀어지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다. 지금 지역구에서 산지 2년이 안 되었고 지금 동네와 플랫에 산지 1년이 안 되었는데 벌써 지겨워졌다. 그래도 이사는 쉽게 결심이 안 서는 건 이 집에서 겪은 모든 게 아직도 너무 생생하기 때문이다. 나도 맹자 어머니처럼 나에게 최선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몇 번이고 이사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내가 맹자 어머니보다 맹자가 되어 내 교육에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이렇게 질렸을 때 일시적으로라도 정서적 거리감을 주는 건 건강에 좋기 때문에, 올해 한 달 정도는 다른 도시에서 지내볼 계획을 하고 있다. 나는 초여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컨설팅 펌과 같이 하는 프로젝트 때문에 그쪽에서 우리 오피스에 상주하면서 빨리 마무리를 하고 싶어 해서 6월까지는 아무래도 출근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상사가 내 상황을 잘 이해해주고 공감도 해주는 터라 7-8월이 좋지 않겠냐고 제안해주었다. 우리 동네에 있는 야외 수영장이 좋아서 여름에는 이 동네에 머물면서 퇴근 후에 수영하는 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활절 휴가 때 한번 잘 계획을 짜 봐야겠다.
에너지가 부족할수록 중요한 데 에너지를 써야 한다. 중요한 건 먼저 해야 한다. 아침을 더 알차게 보낼 생각이고 미라클 모닝까지는 아니더라도 30분 더 일찍 일어나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아침을 채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