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으면 누구나 새로운 계획을 세우곤 한다. 어제 떠올랐던 해와 오늘 아침 뜬 해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해마다 1월 1일이면,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기회를 갖는다. 과거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 일종의 리추얼인 셈이다. 그리고 뭔가 새로 시작된 듯한 희망을 품는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많은 사람들이 여느 해처럼 새해를 맞지 못한 것으로 안다. 2021년 1월 1일을 시작으로 2월 12일 전통 명절인 설, 계절의 흐름으로 만물의 시작을 따지는 절기, 입춘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인에게는 적어도 3번의 새해를 다짐할 기회가 있는 셈이나 올해는 아마 입춘까지도 각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보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입춘이 지나는 2월까지 5인 혹은 10인 이상이 모이는 일은 피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월 즈음이면 백신 접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고, 치료제 개발도 된 것으로 알아 지금부터 봄까지, 이 시간만 잘 보낸다면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 곳곳은 일부 셧다운 되어 마비가 되기도 했고, 팬데믹이 국민적 패닉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좀 불편하기는 했으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살 만했던 듯하다. 모든 국가가 동시에 맞은 문제임에도 해결해 나가는 방식에서 한국은 보다 성숙하고 연대감 높은 시민의식, 우수한 K-방역, ICT 등 이미 대한민국이 선진국임을 재확인하는 기회였다. 나아가 우리가 중요하다 말하지만 정작 ‘먹고사는 일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말하며 미루어왔던 일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검증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코로나 19로 변화된 우리의 일상. 시간 외 근무나 야근이 없어도, 비대면 회의로도, 탄력근무를 해도 익숙하지 않을 뿐, 비교적 괜찮았다. 다만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적응 지체 속도를 조정하기 위한 방안을 찾아야 할 뿐이다. 오히려 불필요한 회식, 모임, 행사 등으로 고스란히 양보하도록 강요되며 후순위로 밀려왔던 나의 소중한 1차적 관계 – 가족 – 와 응당 보내야 했던 시간을 돌려받았던 시기였다. 이들과 건강한 소통을 익히고 추억을 쌓는 방법을 배우고, 갈등을 해결하는 적극적인 훈련이 필요했음을, 그래서 절대적으로 ‘시간’의 배려가 그동안 부족했음을 알게 된, 보다 우리의 이웃과 인간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던 기회였다. 갈등의 회피를 통해서가 아니라.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노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원만한 관계를 위한 의사소통방법을 고민하는 안타까운 성인 내담자가 대한민국에는 참 많다.
물리적으로 공간이 제한된 코로나 19의 세계는 랜선으로 확장되어 오히려 더 넓어졌고, 나만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에 관심을 갖고 상호 유대감과 공감을 갈구하는 존재임을 서로가 재확인한다. 연대, 교류, 협력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생물적 면역체계 및 행동적 면역체계 또한 갖추며 그야말로 지구촌의 정서적 공감대마저 확대된 셈이다.
올해 한국 가톨릭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년을 기념해 희년을 선포한 해로 어려운 이웃에게 코로나 19 백신을 보내고 있다. 안식년과 희년에는 개인의 빚을 탕감하고 각 개인이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했다. 공동체가 이 땅에 생명이 태어날 때부터 먹고살도록 서로를 돌보며 재물이 백성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베풀자는 의미에서 희년을 말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고 방향과 속도를 정해 새롭게 나아가야 할 때다. 그리고 이제는 남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살피며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만 했던 만년 후발국의 대한민국이 아님을 자각하면 싶다. “왜?”를 질문하고 문제를 규정하고 방안을 찾아가는, 효율만 따지는 기능주의적 사고가 아닌, 인문적 성찰과 주체적 사고에 의한, 보다 느리고 지루한 여정의 과제와 책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