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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in Mar 31. 2021

코로나19가 낳은 또 하나의 비극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고립

근래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특별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전문가들과 협업을 통해 시너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오랜 고민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군 사업가부터 사회단체, 학계, 정계에 계신 분들까지 다양했다. 과거 내가 갖고 있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던 이미지는 그 자체가 가진 한계라기보다 그렇게 불리는 특정 개인들의 자질과 역량의 문제에서 비롯된 편견이 아니었나 싶었다.


편협하고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나 역시도 그 단어의 사용을 피해 ‘휴머니스트’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아무리 원하는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정반합의 원리로 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전략임을 이해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석은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여성으로서 내가 이 사회에서 느끼고 겪는 모순의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나의 언어로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오랫동안 미루고 미루다 뜻하지 않은 계기가 생긴 셈이다.


성별이 섞여 앉아 있는 회의 자리에서 어느 대표가 설거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정적인 남편이라 불리는 어느 남자는 퇴근해 집에 돌아와 식사 후 설거지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 분리수거를 한다. 그 남자는 가정에서 설거지와 분리수거를 맨날 자기가 도맡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말하는 것이 우리 주위의 보통 사람들이다.” 그 자리에 동석한 기혼여성은 박장대소하며 공감한다. 그 외에도 여성이 일상에서 부당하다 느끼는 경험들이 이어졌다. 함께한 남성들은 자리가 불편했던 듯하다.


여성문제는 인권의 문제이자 불평등의 문제로 남성의 시각에서는 뭔가 대단한 의기로 뭉친 소명의식이 발동한 대상으로서 다뤄져야 할 거시 담론인데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의 대화는 너무도 소소한 수다에 불과한 데다가 가슴 뜨끔한 장면들이 떠오르는 이야기였기 때문인 듯하다. 간혹 세계평화담론으로 위안부를 ‘제5종 보급품’으로 명명되는 등 전쟁의 각종 피해자로서 여성의 문제를 다루며 평화문제까지 논의를 잇는 것을 본다. 가정 내에서 문제 개선에 대한 노력은 하지 않고, 심지어 아예 그 어떤 문제의식조차 없으면서 이런 세계평화를 운운하는 거대담론자들의 주장은 우습다. 또 비겁하다. 가장 가까이에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정의 평화도 이끌지 못하면서 무슨 허황된 소리인가 싶기도 하다. 도피로 들리고 무책임하게 보인다.


여성문제를 남성의 시각으로 접근했을 경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출발한다.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문제는 이런 추상적 담론을 넘어 경험으로 체득하게 되는 당면한 삶의 문제이자 약자로서 내재된 근원에 관한 문제다. 이런 이유로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소위 ‘잠재적 페미니스트(성 불평등 문제에 민감한으로 표현되는)’다. 또 같은 이유로 잠재된 문제의식의 발현 시기가 달라 같은 여성이라도 어느 사회에 속해서 사회화되느냐에 따라 문제의식에 대한 민감도가 천차만별이고 동시대를 살면서도 결코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 속에 생물학적 동지와의 갈등만으로도 지쳐간다.


정치학을 연구하면서도 굳이 여성 정치학으로 명명하는데 불편함을 느끼는 나다. 그건 남성과 여성의 문제로 구분할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고, 힘의 편중의 문제이며 언어와 리추얼로 정교하게 구성된 문화 속에 끊임없이 재생산된, 가장 장기적인 권력관계 시스템의 결정체라고 나는 본다. 보통 ‘스토리’라는 단어로 통칭해 사용하는 콘텐츠는 새로운 캐릭터의 창조로서 권력자에게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부가되고 생산되는 각종 리추얼과 언어는 권력 시스템을 더 공고히 하는 장치가 된다. 예와 전통, 각종 금기 의식 등을 통해 교육되고, 사회화되어 그 사회의 문화가 되고, 더 오랜 시간을 거쳐 민족의 집단 무의식으로 바닥을 다지고 각종 상징체계로 재구성되어 각 개인마다 사고체계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영향을 미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사고체계는 모국어를 기반으로 하고 감정까지 지배한다는 점이다. 더 자세한 논의는 향후 내 논문으로 재론하기로 하고, 요는 성 불평등의 문제 역시 권력의 문제라는 점이다.


가정폭력, 성추행이나 데이트 폭력, 그루밍을 포함한 성폭력사건 등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더 복합적인 요소가 더해지기도 하지만, 결국 ‘비열한 치들의 약자를 향한 힘의 편중, 왜곡, 과시 등’으로 압축되어 정리된다. 사회구조 내에서 잘못된 정보로 사회화된 이들과 단순한 격리와 처벌로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피해자 역시 단시간에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구조 안에서 영향을 받은 개인은 단순한 사인간의 영향과는 상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최근 코로나 19로 잠지 미뤄두었던 이 프로젝트의 시급성에 마음이 급해졌다. 어느 사회나 가정 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는 자녀에 대한 서비스도 자연히 포함되기 때문에 여성만을 위한 서비스로 국한되지 않는다. 아울러 이렇게 손 놓고 사태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을 우려해야 함을 간과했던 것이다. 감염병의 특성상 사회적 거리두기는 격리를 의미하며, 이는 곧 각종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와 격리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공간적 제약과 비자발적 격리 상황은 스트레스 상황을 증폭시킬 것이고, 그야말로 코로나 19가 낳은 또 다른 비극은 예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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