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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Jan 03. 2022

그런대로 랜선 여행 3. 가고시마 고구마 소주

그때그때 머릿속에 떠오르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대로 살아가는 여행 가방 장사꾼의 여행 이야기


'그런대로 랜선 여행'입니다.




3. 가고시마의 고구마 소주



술을 워낙에 좋아해서 전통주 술집을 차리려고 했지만 모자란 손재주 덕에(?) 지금은 꽤나 유명한 주류 유튜버가 된 고향 친구가 있다. 유튜브에 올릴 영상 찍고, 술 마시고, 술 마시는 방송하고 그것들을 편집하는 게 삶의 전부인 친구다. 전형적인 집돌이 중에서도 상급 집돌이.


그런 친구가 무려 두 달 넘게 유럽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유럽의 맥주를 모조리 마셔보겠다는 포부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다. 집 밖은 위험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친구인데 전 유럽 대륙을 두 달이나 휘젓고 다녔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술꾼들에게 맛있는 술이란 그 자체만으로 여행하는 이유가 된다. 그 친구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술이 맛있는 동네가 좋다. 나에게도 맛있는 술은 여행을 더욱 진하게 기억하는 꽤 쓸모 있는  중 하나다.



이 정도 화산 폭발은 예사다. 나와 여자친구는 불안에 찬 눈빛으로 오들오들 떨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큐슈의 최남단이자 일본 본토의 사실상 최남단, 가고시마에서는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제주도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데다가 바다를 벗한 덕분에 사시사철 온한 기후가 있다. 화산암 지대라서 깨끗한 물이 있지만 쉽게 고이지 않는다. 자연스레 고구마 농사를 많이 짓게 됐다. 가고시마는 일본 고구마 생산량의 30%를 담당하고 있다. 이토록 구황작물이 차고 넘치는데 물이 깨끗하다. 술을 빚지 않으면 고구마와 물의 신에게 죄짓는 거다. 가고시마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고구마 소주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본의 거의 모든 식당에서는 소주보다 사케가 앞에 자리한다. 하지만 이곳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가고시마에서는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소주병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야말로 널린 게 소주다.



2018년의 겨울이었다. 가고시마에서 고구마만큼 유명한 흑돼지 샤브샤브를 먹기 위해 '쿠사소테이'라는 이름의 유명 식당에 들렀다. 이곳에서 곁들인 반주 한 잔으로 나는 이 동네의 소주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먹은 흑돼지 한 점과 소주 한 잔이 아직도 아련하다. 가족들이랑 같이 와야지 그렇게 굳게 다짐했건만, 언제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도 기약이 없다.



당신의 지느러미에 건배



가고시마추오역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가야 되니깐 별로 가깝지 않다. 기리시마진구역 근처에는 정말 맛있는 소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



시내는 고사하고 읍내랄 것도 딱히 없지만



일본의 청춘영화에서 볼 법한 매력적인 빵집이 있는 동네다.



그리고 동네의 자랑 '밝은 농촌'이라는 이름의 소주 양조장도 있다.



곳곳에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이 이곳의 역사를 대신 말하고 있다. 1911년에 창업했으니 올해로 111년이 됐다.



미리 예약을 하면 견학이 가능하다. 나와 여자친구는 그걸 모르고 찾아갔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직원분께서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셨다. 누룩을 발효하는 공간부터 소주를 빚는 마지막 순간까지 친절한 설명이 더해진 견학이다. 일본어가 전혀 안 되는 나와 여자친구는 눈치껏 주워듣는 게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일본어가 되는 분들에게는 정말 재미진 시간이 될 것이다.



견학에 관심이 없으면 바로 여기로 달려도 된다. 양조장의 존재 의의는 시음으로써 완성된다. 양조장의 끝자락에 자리한 시음장에서는 밝은 농촌에서 만드는 거의 모든 소주를 원 없이 마셔 볼 수 있다. 한정판으로 나오는 오지게 비싼 것들만 빼고 말이다.


저렴한 것부터 한 잔씩 건네주신다. 그리고 마시면서 생각했다. 이곳의 가격 책정은 절묘함을 넘어 감탄이 나오는 수준이다. 1테라 외장하드를 사려다가 결국 4테라짜리 사게 되는 것처럼, 한 잔씩 마시다 보면 구렁이 담 넘듯이 비싼 녀석으로 마음이 간다.



사진 속 보라색 병이 가장 일반적이면서 많이 팔리는 녀석이다. 750ml 기준으로 한 병에 14,000원 정도 한다. 그리 비싼 건 아니지만 소주인 걸 감안했을 때 아주 싼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이 녀석을 사려고 했었다.



딱 두 배 비싼 녀석으로 결정했다.


3년 숙성한 소주라서 다를 거라고 하셨는데 진짜 다르다. 맛과 향의 수준이 아예 다르다. 숙성조의 향과 함께 스민 3년의 세월은 술의 품격을 아예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3만 원도 안 하는 술에서 마주했다고 하기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한 격조가 있었다. 조금 전의 보라색 병과 비교해서 가격 차이가 두 배밖에 안 나는데 이걸 고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이 녀석으로 골라 버렸다.


다음에 가고시마 가면 이거 꼭 사 올 거다. 관세를 내더라도 두 병 사 올 거다. 이때 사 온 건 친구랑 여수 여행 갔다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사람들이랑 나눠 마셨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마셨으니 후회는 없지만 후회가 된다. 아주 크게 후회가 된다. 다음에는 두 병 사서 혼자 마셔야겠다.



산 넘고 물 건너 발 닿기 힘든 곳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술이 고프다면 가볼 만하다.


고생한 만큼 보람도 있다. 밝은 농촌에서 빚는 술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 비행편으로 전광판을 꽉 채우고 남는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쯤 다시 볕 드는 날이 올까. 이 시국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마음이 그저 서늘하다.


이 전광판 앞에 선 것은 아마도 2019년의 초입이었다. 또다시 가고시마를 찾았다.



오늘 함께할 친구는 '사쓰마 무소'라는 이름의 양조장이다.



지난번에 찾은 밝은 농촌보다 규모가 조금 더 본격적이다.



가고시마에는 1,000곳이 넘는 소주 양조장이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선택하는 것도 나름 고통이 수반되는 일이다. 너무 어려우면 공식 여행 홈페이지에 올라온 양조장 가이드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고시마 시에서는 '가고시마 가고싶다'(...)라는 이름의 공식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 양조장개방된 구조 덕분에 내부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역시나 견학에는 관심이 없지만 보이는 김에 조금 구경해 보았다.



생각보다 전통적이라서 보여주기 위함인가 생각했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본격적이다. 유리창 너머로 직원들이 뭔가 끊임없이 하고 있는 걸 보면 실제로 쓰이는 설비인 것 같다.



원한다면 더 탐구할 수 있지만 구경은 이 정도면 충분다. 이제부터 본론의 시간이다.



공장 규모부터 장난이 아니다 싶더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 양조장에서만 백 가지 넘는 소주를 만드는 것 같다. 여기도 겁나게 비싼 것 빼고 모조리 시음이 가능하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맛보는 것도 일이다.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조금씩 마셔야 한다. 물도 계속 마셔가면서.



한 병에 3백만 원 가까이하는 소주도 있다. 돈 많이 벌면 여기 와서 이 녀석을 사야지 마음먹었는데 아직까지는 쉽지 않다.



한 병 사들고 숙소에서 느긋하게 마시려고 했는데 이미 취해 버렸다. 취할까 봐 쥐꼬리만큼 따라서 홀짝거렸는데 쥐꼬리도 서른 잔 넘게 모이니깐 취한다.



아주 비싼 녀석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서민가격대에서는 전반적으로 밝은 농촌보다 수준이 떨어다. 다음에는 다른 곳을 가봐야겠다.


이제 두 곳 가봤다. 아직 못 가본 곳이 천 군데가 넘는다. 매일 한 군데씩 둘러봐도 3년이 걸린다. 갈길이 멀다.



대한민국의 모든 주당들을 모십니다. 증류식 소주라서 다음날도 깔끔합니다. 술이 고픈 자, 가고시마로 오세요.





직접 만든 가방입니다. 소주병 넉넉하게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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