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적 계절학기 때문에 베트남 친구와 잠시 방을 쓴 것을 제외하면 연결고리도 딱히 없었다.여담이지만, 기도를 한답시고 제멋대로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나를 문 밖에 세워두기 일쑤인 친구였다. 말로 잘 타일러서해결하긴 했지만 처음 며칠은 이 놈을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내가 만든 여행 가방은 꽤 잘 팔렸다. 근데 아무리 팔아도 남는 게 없었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에 나름 자부심도 있었고 시작을 함께한 공장 사장님들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뭔가 잘못 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남 좋은 일만 하다가 굶어 죽을 것 같았다. 베트남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산처를 옮기게 된 것이다.
도저히 적응되지 않을 것 같던 더위와 습기는 그러려니 생각하면서 넘기게 됐다. 신호등 따위 아무 짝에 쓸모없는, 도심 속 인파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오토바이 행렬이 뿜어내는 매연을 한 바가지 들이키면서도 별 생각 않게 됐다. 가방 장사꾼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연은 짧았고 여운은 오래 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시국이 찾아온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야 하는 약속의 땅처럼 남아 버렸다. 계속 가방 장사를 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존버, 또 존버.
존버의 끝에는 분명 하이퐁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공항 앞 노상 카페에서 파는 아이스커피 한 잔을 마실 테다.
내 가방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는 하이퐁은 사실상 LG전자가 먹여 살리다시피 하는 도시다. 그 덕분에 가장 번화한 거리 역시 코리아 타운의 차지다. '반 까오'라고 부르는 한인 거리에는 MYA TEA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나는 여기의 코코넛 커피를 좋아한다.
출장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혹여나 생산이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확인하는 시간의 연속이다. 그래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항상 곤두서 있다. 여정이 무사히 끝나는 순간의 안도와 기쁨을 제대로 즐기려면 여기의 코코넛 커피 만한 것이 없다. 다리가 높은 의자에 대충 걸터앉은 채 멍 때리면서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여기 커피를 다시 마시기 위해서라도 가방을 잘 팔아야 한다. 목욕하고 나와서 마시는 단지우유처럼 여기의 코코넛 커피도 맥락이 중요한 녀석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출장길에 올랐을 때 마셔야 하는 커피다.
이제는 꽤나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하노이에만 30군데가 넘는 매장이 있는 콩카페. 나는 그중에서도 서호의 서쪽에 위치한 이곳을 가장 좋아한다.
하노이에서 가장 거대한 호수를 벗하고 있지만 인적이 드물다. 호반의 여유를 벗 삼아 조용히 시간 보내고 싶다면 여기 만한 곳이 없다.
양쪽으로 좁게 달린 낡은 문은 삐걱거리는 건 물론이고 잘 움직이지도 않는다. 꽤 힘을 줘야지 반응하는 문을 열어젖히고 나면 가라앉은 채도가 지배하는 낡은 공기의 세상이 펼쳐진다. 마치 외부와 단절된 비밀 공간으로 향하는 차원문을 넘는 듯한 기분이다.
호수의 전경을 바라보기 좋은 2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는다. 서호를 벗한 채 코코넛 커피 한 잔과 즐기는 망중한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호안끼엠 근처의 그 어떤 콩카페에서도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얘기해도 대부분 믿지 않고, 경험하고 나서야 어쩔 도리 없이 당하는 것이 하노이의 겨울이다. 동남아는 사시사철 여름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노이의 겨울은 가끔 두꺼운 패딩이 필요할 정도로 춥다.
하노이의 겨울은 정말 춥다. 어이없을 정도로 춥다. 패딩 없이는 저항할 틈도 새도 없다. 서서히 파고드는 한기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했지만 나는 결국 이날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따뜻한 걸 마시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람 몸뚱아리에 비해서 커피 한 잔이 품고 있는 열에너지는 너무나 미미하다. 그나마도 공기 중으로 온기를 뺏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다음에는 여름에 가던가 패딩을 꼭 가져가겠습니다. 올해 안에는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사정없이 몰아치는 한기를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이겨내지 못했다. 쫓기듯이 콩카페를 나왔다. 몸에 열을 내면 괜찮아질까 부지런히 걷다 보니 배가 아파온다 (...)
절망의 문턱 앞에서 구세주처럼 등장한 카페, 왠지 깨끗한 화장실이 있을 것 같다. 더 이상의 고민은 사치다.
주문하기도 전에 화장실로 먼저 달렸다. 바라던 대로 화장실은 깨끗했다.
...
대부분의 우발적인 선택은 후회로 귀결되지만 그런 만큼 얻어걸렸을 때의 보상이 확실하다. 아마도 지금까지 마셔본 가장 맛있는 콜드브루가 여기에 있다.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추위에 사시나무 떨듯 굳어버린 몸이 여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시킨 이곳의 콜드브루는 정말 맛있었다.
갑자기 배가 아팠던 그때의 나 칭찬합니다.
다시 간다면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커피가 마시고 싶다.
공항을 나서면서 입국 도장 찍듯이 마시던 아이스커피 한 잔이 그립고 여정의 마지막을 달래던 코코넛 커피 한 잔이 그립다. 보일 때마다 들락거렸던 콩카페도 그립고 서호에서 마신 콜드브루도 그립다. 아마도 여정의 가장 안락한 순간을 함께하던 녀석들이라서 그렇다. 나는 베트남의 커피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