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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Dec 20. 2023

가방장이, 새 여행 가방을 만들다.


시작은 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년 만의 여행이자 출장. 베트남으로 향하는 비행기의 흔들림은 예나 지금이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참으로 긴 터널이었다. 조명 하나 없이 그저 암흑 속인 터널을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비춘 서광, 하지만 너무나 먼 거리를 달려온 듯하다. 터널 밖의 세상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너무나 간만이라 걱정을 많이 했지만 생산은 예전처럼 순조로웠다. 생산을 담당하는 베트남 공장 직원분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고, 쉬고 있는 녀석들이 이따금 보이긴 했지만 미싱 돌아가는 소리도 여전히 우렁찼다.


숙소로 돌아와서 약간 울었다. 안도감이었을까, 지나온 세월에 대한 약간의 회한이었을까.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물류 창고에 입고된 가방들을 다시 한번 검수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이제는 밀린 숙제를 해야겠다'


그렇게 나는 한쪽 벽면에 걸린 캔버스 백팩을 한동안 망연했다.



2021년 말에 만들었으니 2년이 다 되었다. 이 시국이 끝나간다고 생각해서 만들었는데 여행이 돌아오기까지는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결국 이 녀석은 나의 일상과 함께하는 나만 좋은 가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세상의 빛을 볼 시간이 되었다.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분명 존재했지만 잘 다듬으면 충분히 훌륭한 가방이 될 재목이었다.


창의력을 펼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높은 천정으로부터 창의력은 발현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천정은 모름지기 하늘이다.



모자란 부분들을 해소하고 필요 없는 부분들은 덜어냈다. 그렇게 이틀 남짓을 고군분투한 끝에 완성한 도면. 치수를 새기고 필요한 원단과 자재도 꼼꼼하게 기록한다.


시작선에 설 준비를 마쳤다. 이제부터는 발품팔이의 시간이다.



내 오랜 삶의 터전. 여기는 신설동에 있는 가방 자재 종합 시장이다.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지라 이 동네의 사정도 옛날 같지 않다. 하지만 가방을 만드는 이들은 여전히 하루가 멀다 하고 이 동네를 들락거린다.



매장의 수가 많지 않다. 모조리 돌아봐도 백 곳 남짓일 테다. 그러므로 한 곳도 빼놓지 않는다.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매장도 일단 문을 열어젖히고 본다. 그 어떤 연결 고리가 뜻밖에 우리 사이를 이어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구한 자재들이 양산에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생산을 담당하는 벤더는 내가 어떤 자재를 수배하든 언제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지런히 유람하고 꼼꼼하게 탐색한다. 내 몸이 피곤한 만큼 벤더사가 수배하는 자재의 품질이 높아진다.



꼬박 3일을 살다시피 한 끝에 모든 임무를 마쳤다. 원단을 구하는 게 상상이상으로 어려웠던 탓이다.


내가 원하는 느낌의 원단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슷한 원단이 들어간 가방을 하나 샀고, 그 녀석을 들고 3일 밤낮을 장돌뱅이처럼 돌아다녔다.


벌써부터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7부 능선을 넘는 중이긴 하다. 허나 이제 겨우 출국 수속장에 도착한 여행자일 뿐이다. 비행기는 아직 뜨지도 않았다.



수배한 자재와 예전에 만든 가방과 도면을 들고 벤더사를 찾았다. 그러고는 난상 토론을 시작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살펴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일을 한정 없이 하게 될 테다.



그리고 마침내 자재 교체의 시간.


내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녀도 벤더사의 손바닥 안이다. 군용 제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벤더사인 덕분에 기능과 내구성에 있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자재들이 한가득이다. 언제나처럼 눈을 반짝이며 신중하게 고르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디자이너님의 손길에 의해 제대로 된 도면도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약간의 기다림뿐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함께.



그 사이에 나는 가족들과 함께 홍콩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간만이었다. 변한 것이 적지 않지만 홍콩의 낮과 밤은 여전히 아름답고 찬연했다. 가족들과 함께라서 더 좋았다.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11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벤더사에서 두 장의 사진이 날아들었다. 샘플이 완성되자마자 현지에서 보내온 사진이었다.


이 가방이 한국으로 날아오는 데까지 딱 3일이 걸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 3일은 단언컨대 올해를 통틀어, 아니 요 근래 몇 년을 통틀어 가장 길고 힘든 3일이었다.



내가 처음 받은 사진의 정체를 여전히 알지 못한다. 마주한 실물은 사진과 완전히 달랐다. 천만다행으로 아주 좋은 의미로 말이다.



디자인, 기능, 분위기. 모든 것이 의도한 그대로였다. 불과 3일의 시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수십 번은 오간 듯하다.



무사히 샘플을 받아 들었으니 남은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시간은 금이요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신속정확의 미덕이니, 지체 없이 길을 나섰고 필요한 일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사진 찍을 장소부터 섭외했다. 서울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예쁜 빛을 기록하고 기억했다. 사진으로 꼼꼼하게 남겨서 원하는 구도와 시간, 빛의 질감 모든 것을 그대로 재현할 준비를 마쳤다.



모델은 나의 대학 동기와 그놈의 여자친구께서 수고해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_ _)



이 녀석의 이름은 '여가 서울'이다. 조금 더 일상과 가까이에 있는 가방이라는 의도의 표명이었다.



기존에 만든 것들의 이름은 여가 '홍콩'과 여가 '오사카'다. 그에 비하면 이 녀석의 이름은 내가 만든 그 어떤 가방보다 우리네 일상과 가깝다.



생각보다 크다. 보부상 가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런 가방의 핵심 요소인 넉넉함은 탐이 났다.



여행 가방으로의 정체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너무나 당연한 녀석이라 긴 설명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튼튼하고 견고하다. 일을 아주 잘한다.



내 가방의 핵심이 되는 정체성을 조금 더 발전시켜 계승했다. 여권이 들어가는 등판의 비밀 공간을 '오거나이저' 스타일로 바꿔 보았다.


여권도 들어가고 환전한 돈도 들어가고 교통카드나 신용카드도 잔뜩 넣을 수 있다. 이 자체로 지갑이 되는 것이다.



두꺼운 걸 넣으면 허리가 아프지 않냐는 물음이 있었다. 나도 궁금했다. 그래서 샤오미 보조배터리를 넣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 보았다.


아무 문제없다. 나중에는 배터리가 들어있는 줄도 까먹고 걸었다.



노트북은 15.6인치까지 아주 넉넉하다. 집에 있는 15.6인치의 게이밍 노트북도 넣어 보았다. 역시나 넉넉했다. 조금 더 큰 것도 들어갈 것 같다. 16인치까지는 여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쓸모가 넘치는 기능이 아주 많다.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방수다. 기존 가방도 방수 성능은 꽤나 훌륭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예 비교를 불허한다.


앞에 달린 주머니는 구조상 완전 방수가 어렵다. 그걸 가능케 하려면 지퍼 선을 없애야 하는데 그러면 주머니로 쓸 수가 없으니, 저런 류 주머니 중에 완전히 방수가 되는 가방은 본드로 붙인 게 아닌 이상 없다고 봐도 된다.


메인 공간의 방수 성능이 발군이다. 물을 붓다가 붓다가 나중에는 2리터짜리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워 통으로 쏟아 봤는데도 가방 속에는 흔적 하나 없다. 덕분에 요 근래 비 오는 날에 아주 편하게 다녔다.



지금까지 만든 가방 중에서 어깨가 가장 편한 가방이다. 확실히 잘 만들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그래서 객관적인 평가가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애정을 쏟은 보람이 있다.


객관적인 평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2년 동안 부지런히 메고 사용성을 평가했던 비교 대상이 존재한다. 그것과 비교해도 이 녀석은 모든 부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예전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용성 측면에서는 가히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다.




텀블벅에서 열심히 함께할 분들을 모시는 중이다. 간만이라서 각 잡고 만들었고, 그런 만큼 정말로 일 잘하고 디자인도 괜찮은 녀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만 쓰기는 아깝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합류하셨지만 여러분도 그 대열에 합류하시는 거 어떨까요. 여가 서울은 오늘도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저와 함께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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