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유학을 갔을 때, 한국사람 말고는 내 이름을 똑바로 부르는 사람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10년의 해외생활 동안 내 이름을 똑바로 부르는 사람은 몇 명 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특히나 영어로 쓰면 정확한 발음을 표현하기도 없는 "은"자 때문에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내 이름은 정말 가혹한(?) 시험이기도 했다. 다들 어떻게든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기도 했고, 또 결국 불러야 할 때에는 "이렇게 발음하는 것이 맞니?"라고 정말 세상 조심스럽게 물어보고는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똑바로 부르지 못하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내 이름을 똑바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나는 알아듣기 쉽게 발음해줬다고 생각을 해도, 결국 T로 시작하는 영어이름으로 오해하고 Taylor, Terry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래서 비행기 표를 바꾸거나, AS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전화를 걸어서 이름을 말할 때는 철자를 불러주면서 신원을 확인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나 역시 상대편이 내 이름을 알아듣는 것을 거의 기대한 적이 없다). 한 가지 웃긴 에피소드가 있는데- 나를 아주 아껴주셨던 교수님께 전화를 했을 때(평소 내 이름을 잘 발음하신다고 생각했던 분이다), 아무리 내가 "00이에요~"라고 말을 해도 한참을 못 알아들으시는 거다. 그러다가 결국 나는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했는데, 그게 결국 "your Korean student studying anthropology," 그러니까 인류학을 공부하는 선생님의 제자예요-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르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 이름의 철자를 심지어 틀리게 쓸 때가 많았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문제는 내가 메일이나 문서로 먼저 내 이름을 보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틀리게 써서 보내더라는 것이다. 길지도 않은 이름의 철자를 어찌 그리 틀리게 쓰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더 웃겼던 것은 내가 몇 번이나 똑바로 써달라고 해도 고집스럽게(?) 틀린 철자로 보내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Mary나 John과 같이 흔하지 않은 이름철자라 그랬을까. 아니면 그건 그냥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 사람들의 습관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사실 이름에 조금 예민한 축에 속했다. 어릴 때는 내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이 괜히 맘에 들지 않았고, 또 치킨이나 커피를 시키면서 이름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엉뚱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받게 되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미국에 가서, 그리고 케냐에 가서 내 이름을 완전 생전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발음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나중에는 내 이름이 망가지는(?) 상황에도 꽤나 익숙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어 이름을 만들지 않았다. 굳이 샌드위치나 커피를 주문하면서 이름을 말해줘야 할 때는, 나의 성인 김 씨에 착안하여 Kim이라고 둘러대면서 넘어가기는 했지만, 한 번도 한국식으로 발음하는 내 이름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 내가 내 이름을 순식간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한편으로는 저항도 못하고 포기하게 된 사건은 처음 케냐 땅을 밟았던 2010년 12월 13일의 일이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을까. 런던 히드로에서 나이로비까지 비행하여 조모 케냐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조모 케냐타는 초대 대통령이자 키쿠유 공동체의 지도자였는데, 알고 보면 그는 영국에서 Malinowski에게 지도를 받은 인류학자다) 미국이 아닌 외국은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약간 긴장한 마음으로 입국심사를 받았는데, 다행히 그 악명 높은(?) 뇌물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고, 심사를 받는 줄도 그다지 길지 않아서 손쉽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그때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일을 저질렀던(?)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곳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찾아서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을 만나기로 한 상태였다. 심지어 숙식비와 봉사활동 참가비까지 다 송금해놓고 말이다. 그게 바로 조아저씨였다. 그건 내게 정말 큰 행운과도 같은 만남이었는데, 조아저씨와의 만남에 1년 치 운이 들어갔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던 부분이고...
2010년 12월 13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도시의 공항에 내려 도착한 승객들을 기다리며 빽빽하게 자리를 메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쳐다보면서는 몇 분 동안은 후회를 했던 것 같다.
"대체 내가 뭘 믿고 그렇게 돈을 송금했지...... 여기 아무도 안 나와 있으면 어쩌지......"
그때, 내 이름의 영어 철자를 뭔가 엉성하게 (정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쓰고 들고 있는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신사를 발견했다. 철자가 다 틀린 내 이름이 얼마나 반가웠던가. 영국에서 오는 비행기를 타고 와서 그랬는지, 내가 나오던 시간대에 동양인이 거의 없었고, 당연히 동양인 여성을 기다리고 있었던 조아저씨는 순식간에 자기가 들고 있는 종이에 써진 이름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아셨던 듯 가볍게 손짓을 했다.
뭐라고 인사했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아저씨는 그때 간단한 인사를 하면서 (마치 자주 봤던 사람에게 하듯이 하면서) 말했다.
"타이라고 부르면 되지? 타이?"
그건 뭐였을까. 수년 동안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변형을 하고 실수를 해도 포기하지 않았던 내 이름을 포기하게 만든 그 친근함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몇 초 상간에 내 이름을 고쳐서 부르도록 요청하는 것을 그냥 포기했다. 아니, 포기라는 단어도 너무 거창할 정도로 그냥 "아, 네..." 하고 지나갔던 것 같은 그런 순간이다.
그렇게 나는 타이가 되었다. 케냐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타이라고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곳의 맥락 속에 그 이름이 조금씩은 변경될 때가 있기는 했는데, 예로 들면, 수녀원에서는 "시스터 타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아이들에게는 "므왈리무(선생님) 타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Kim이라는 발음이 이름에 흔한 칼렌진 사람들의 땅에 갔을 때는 "키므타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어딜 가나, 타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그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