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Aug 15. 2024

오키나와에서 5시간을 더 가야 닿는 곳

바다가 아름다운 작은 섬으로 떠나다(4)

(지난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4박 5일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대부분 아쉬움 없이 잘 다녀왔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정 중에 비행기 시간을 제외하고도 배를 타고 왕복 10시간의 이동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라면?

게다가 배가 뜨는 시간도 하루에 1번이라 부득이하게 숙박 일수를 늘려야 한다면 어떨까.


다녀온 건 4박 5일의 일정이었지만 사실상 2박 3일, 많이 쳐도 3박 4일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비효율적인 일정이다. 특히나 연차 하루하루가 소중한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는 여행 일정을 하루라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가자! 요론섬으로!


오키나와 나하 항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로 숙소를 잡은 게 신의 한 수였다.


오키나와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고 드디어 다음 날이 밝았다. 한국에서는 그렇게나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이 드는데도(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렇다) 여기에선 귀신 같이 눈이 떠졌다. 오전 7시 출항이었는데 티켓 예매를 출국 전에 미리 해두었기 때문에 6시 30분 정도에 항구에 도착했다. 탑승과 관련된 사전 안내 사항에서도 특별한 내용은 없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갔다. 우리가 탑승할 페리가 보였다. 생각해 보면 12살 때 처음 일본을 갈 때에도 비행기가 아니라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갔었다.


우리가 탔던 페리와 항구 내부의 전경


항구의 로비라고 해야 할까, 내부는 우리나라의 80년대~90년대가 연상되는 예스러운 모습이었다. 내가 미처 태어나지도 않았을, 혹은 갓난아기였을 그 시절의 기운이 느껴져서였을까, 왠지 모를 안락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웬걸, 미리 파악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 예매를 했든 하지 않았든 공통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승선 신청서가 있었던 것이다.


승선 신청서는 예매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승선객이 현장에서 필수로 작성해야 한다.


서류는 대부분이 일본어로 적혀있었고 그나마 몇 개 있는 영어 단어는 서류를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외국인들을 위한 안내사항이 친절하게 붙어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친절하지가 않은 탓에 우리에게 친숙한 파파고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파파고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이 서류를 작성하고 또 줄을 서서 최종적으로 종이 티켓을 받아야 승선 절차가 마무리되는 거였다.


파파고 찬스와 함께 검색의 달인인 짝꿍이 빠르게 찾아낸 정보를 참고하여 서류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분이 우리가 그러했듯 승선 신청서의 존재에 적잖게 당황하는 걸 발견했다. 조심스레 다가가 한국인이시냐고 물으며 우리가 찾은 정보를 공유해 드렸다. 뿌듯한 마음으로 먼저 줄을 서서 그 여성분이 서류를 작성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일본 현지인으로 보이는 한 남성분이 그 여성분께 다가가 뭔가 도움을 주는 모습이 보였다.

'훗, 이미 우리가 다 알려드렸다고!'라고 생각하며, 그 일본인이 느꼈어야 할 뿌듯함을 내가 다 가져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안함(?)을 느끼며 의기양양해 있을 때, 한국인 여성분이 내게로 다가왔다.


"저기, 이건 이걸 적어야 하고, 여긴 이게 아니고 이거래요.. 어쩌고..."


이게 무슨 낭패인가. 잘못된 정보로 괜히 서류 작성에 시간을 더 들이게 만들어드린 것 같아 당혹스러움과 죄송스러움이 밀려들어왔다. 그럼에도 친절하게 다시 오셔서 정보를 정정시켜 주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추후에 티켓을 받을 때 항구 직원분이 또 한 번 점검 및 수정을 해주시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됐을 부분이었다)


친절한 그녀는 인복이 많았다. 일단 줄을 먼저 서계셨던 (남편이거나 남자친구로 보였던) 일행 덕분에 우리보다 서류를 늦게 작성했지만 줄은 앞쪽에 설 수 있었고, 마침 그녀 앞에 있던 재일 교포 여성분께서 그들이 한국어를 하는 것을 듣고는 말을 거시면서 짧은 통역 서비스를 제공해 주셨다. 줄을 서기 전 서류 작성할 때 일본인 남성분이 도와준 것도 빼놓을 수 없지. 내가 도와드린 것은.. 그것도 인복이라면 인복일 수 있지 않겠나(하하).





페리의 내부는 외부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크고 넓었다. 로비도 있고 매점도 있고 나와서 얘기하거나 바다를 보며 물 멍을 때릴 수 있는 창가 좌석도 마련되어 있었다. 샤워실도 있고 흡연실도 갖춰져 있고 매점과 식당, 자판기까지 있어서 배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하긴, 요론섬까지 다섯 시간을 꼬박 달려야 하는데 답답한 배였다면 쉽지 않았을 테지.



창가에 보이는 두 사람은 한국인이었다. 이때는 몰랐지 이 분들이 귀인이 되실 줄은


기본으로 배정되는 좌석은 군대 훈련소 내무반처럼 접이식 간이 매트리스와 모포가 놓여있다. 소독을 언제 했을지 궁금하지만 구태여 물어서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비주얼이다. 배 전체 시설이 최신식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 냄새(?)가 좀 났다. 위생이나 청결에 민감하신 분들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섯 시간이라는 긴 여정 앞에 웬만한 사람은 다 타협하게 될 것이다. 졸음 앞엔 장사 없는 법. 아무리 구경할 거리가 많아도 눈을 붙이고 꿀잠 자는 것만큼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것이 또 없다.


배정받은 가장 기본 좌석. 군대 훈련소 내무반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불이 각잡혀 접혀 있진 않다. 배 내부에는 매점과 자판기도 있다.



기상 상태가 좋지 못하면 배가 요론섬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의 다른 섬에 내려준다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우리가 갔던 날은 날씨가 너무나도 화창했다. 그 거대한 배가 오키나와 나하 항구를 떠나 요론으로 출발했다. 실내에서 답답함이 느껴질 때마다,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바다의 짙은 푸름에 눈이 시려질 때면, 갑판으로 나와 바다를 온몸으로 마주했다.


뜨거운 여름 공기가 살갗을 따갑게 달궜지만 귀에 들어오는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 눈에 보이는 바다가 배에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부서지는 포말만큼은 시원한 감각을 자아냈다. 갑판 꼭대기에는 중요부위만 간신히 가린, 팬티라고도 할 수도 없는 천 쪼가리를 걸친 호리호리한 남성분이 태닝을 하고 있었다. 몸이 제법 탄탄하셨기에 안 본눈을 사러 다닐 필요는 없었다. 갑판 위에서의 고독한 태닝이라... 낭만 있잖아? 아마 내가 혼자 여행을 왔다면 옆에서 같이 해도 되겠냐고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오키나와를 출발한 대양의 한복판의 짙은 색도 요론의 에메랄드빛 바다 만큼이나 매력 넘친다.



페리 내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좌석은 아무래도 바다를 보며 멍 때릴 수 있는 창가 좌석이다. 누군가는 배에 타자마자 자기 가방을 빈 좌석에 올려두고 다섯 시간 동안 자유롭게 자리를 비우면서 개인 좌석처럼 사용하기도 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만큼 매력이 있는 좌석이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며 과연 그 옛날의 대항해시대의 사람들이 '저 바다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던지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보게 만든다. 지금처럼 지식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도 저 바다 끝을 향해 나아가볼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망망대해라는 말을 온몸으로 실감하던 순간


여행 중에 책을 읽을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 가볍게 한 권 들고 온 책이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반복하는가>. 회사에서 나와서 나만의 길을 가겠노라 선언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른다. 답이 없는 길 위에선 인간은 늘 괴로움과 고뇌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건 그런 길을 걷는 자가 맞이하게 되는 필연적인 장면이다. 마치 바다가 가까이 있는 지역에는 습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것을 힘듦으로 받아들이느냐, 재미와 설렘으로 받아들이느냐는 길을 걷는 자의 몫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여행에 오면 괜히 저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짙은 파랑 일색에 낯선 에메랄드 빛이 일렁이기 시작할 때, 요론에 도착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다섯 시간이 눈 깜짝할 (그래도 세 번 정도는) 새 지나갔다. 요론 항에 배가 입항하는 것을 갑판으로 나와 구경했다. 항구에는 관광객들을 마중 나온 숙소의 픽업 차량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나 반갑고 또 그리웠던 건지.

'곤니찌와-!!' 내향인인 나는, 항구에 나와있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만 인사말을 연신 외쳐댔다. 이게 낮 시간에 하는 인사말 맞지? 확인하면서. 손도 흔들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그들과 내 옆의 짝꿍은 전혀 눈치 못 챘겠지만 말이다.


요론항의 풍경과 숙소 픽업 차량 내부 전경. 우측에 계신 분들이 처음 배에 탔을 때 보이던 한국인 두 분이었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의 픽업 차량이 보였다. 기적처럼 2박을 하나씩 쟁취해냈던 감동의 순간들이 새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 흐뭇함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구릿빛 피부가 건강해 보이는 남성분이 밝은 미소와 함께 우리를 맞아주셨다. 우리 둘을 포함하여, 한국인 남성 두 분, 중년의 일본인 부부 이렇게 3팀이 승합차에 올랐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요론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고 어안이 벙벙했다. 곳곳이 바다일 줄로만 알았는데 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바다가 많이 보이지 않기도 했다. 운전을 하시던 사장님이 숙소 체크인과 관련하여 안내 사항을 말씀해 주셨다. 봐주는 거(?) 전혀 없는 순도 100%의 일본어였다. 뭐라고 하는지 당연히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한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이 더 많이 오는 곳이니 당연했다. 나 지금 한국인 관광 명소가 아니라 일본인들 틈바구니에 껴 있구나. 그 순간이 요론에 왔다는 실감이 났던 의외의 포인트였다.


그 뜻밖의 실감 포인트는 이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확신으로 굳어졌다.


드디어 왔구나 요론토 빌리지!

그렇게 감격스럽게 얻어낸 숙소에 입성하던 순간이었다.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밋밋하거나 소박하지도 않은 딱 좋은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요론토빌리지. 숙소 옆에는 영화 <안경>에서 보던 숙소 '하마다'도 있었다.


요론토빌리지의 입구. 레스토랑이자 숙소 체크인 로비인 Tara가 우릴 반겨준다. 우측 사진은 영화에서 숙소 '하마다'로 쓰였던 건물.


가슴이 간질간질거렸다. 비로소 진짜 우리의 일정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딘가 놓친 게 있다는 조바심의 표현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원래는 젊을 때 고생도 사서 하는 거라며 자전거로 요론 섬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던 우리였다.


하지만 오키나와 땅을 밟자마자 엄습한 덥고 습한 기후를 몸소 겪은 이후에 그건 못할 짓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론에 도착하는 대로 렌터카 남는 게 있냐고 문의할 생각이었다. 물론 파파고로. 섬 전체를 통 틀어서 우리 두 사람이 탈 차 한대쯤은 있지 않겠어?


그건 오산, 아니 오만이었고 무지였다. 차는 물론이거니와, 전기 자전거마저 딱 1대 남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애석하게도 친절한 사장님은 파파고를 두드리고 있는 처량한 한국인 커플에게 많은 시간을 내어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빠 보이셨다. 그때 구세주역할을 해주신 분들이 나타났다. 아까 픽업 차량에 동승했던 한국인 남성 분들이셨다.


두 사람 다 일본어를 알아듣는 것은 큰 지장이 없었고, 심지어 한 분은 일본인 수준으로 말도 잘하시는 분이셨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기적처럼 전기 자전거 4대를 빌릴 수 있었다(1대 밖에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3대를 만들어 낸 건지는 지금도 의문이긴 하다).


이건 내 고집스러운 내 맘대로 식의 해석인데, 항구에서 먼저 내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한국인에게 (어설프고 잘못된 정보를 쥔) 손을 내밀었던 그 경험이 어쨌거나 우리에게 부메랑처럼 도움으로 되돌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사람은 평소에 뿌린 대로 거두는 게 맞다. (어쨌거나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한바탕 예약 소동(?)이 끝나고 체크인 준비가 예정보다 빨리 되어 일찍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키나와서 잤던 전형적인 협소한 일본형 숙소와는 다르게 탁 트인 실내와 (에어컨으로 한껏 뽀송해진) 공기와 습도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생해서 얻어낸 그 보람찬 단맛을 다시 한번 더 음미했다.


넓은 공간, 그리고 저 다다미 같이 높은 곳에 배치된 매트리스. 침대가 아니라서 일본스러움이 더 묻어나는 것 같아 좋았다.



숙소에서 잠깐 땀을 식히고 숨을 돌리자 대여를 신청한 전기 자전거가 숙소에 도착했다.


렌터카가 없다는 사실은 절망이 될 뻔했다. 사실 전기 자전거라도 땡볕에 타고 돌아다니는 건 고역이다.

하지만 그 날씨에 일반 자전거를 타거나 최악의 경우 걸어 다녀야 했을 수도 있던 상황에 전기자전거라도 얻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다. 아마 전기 자전거는 많고 렌터카만 없는 상황이었다면 배부른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자마자 느껴지는 요론섬의 더위에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 돌아와서 생각해도, 비록 결과적인 얘기지만, 전기 자전거로 요론섬 곳곳을 누빈 것은(정확하게는 렌터카 예약을 못한 것은) 참으로 잘한 결정이었다.


(To Be CONTINUED..)





다음글 예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처음 마주친 요론 블루

등은 땀으로 젖었어도 바다의 푸른 물결이 가슴을 적시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22년 만에 다시 간 일본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