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아름다운 작은 섬으로 떠나다(5)
(지난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매우 뜨거웠고, 약간은 습했다. 여름의 요론은 동남아의 날씨를 떠올리면 되겠다.
그런 날에 나와 짝꿍은 자전거를(그나마 전기 자전거인 점이 다행이다) 타고서 요론섬을 돌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버스나 택시 등의 대중교통은 거의 전무했다.
요론섬 관광 정보를 알려주는 홈페이지에 따르면 요론섬에 택시가 2대라나..?
20대도 아니고 2대라니. 버스도 있다고 했는데 요론을 여행하면서 한 번도 버스를 본 적이 없다.
'죽기야 하겠어?'
대책 없이 스스로를 내던질 때 우리 커플이 습관처럼 내뱉는 말. 정말 죽지만 않았다.
자전거에 올라타자마자 작렬하는 태양에 뜨겁게 달궈진 안장에 엉덩이는 구워지는 듯했고 페달을 밟고 자전거가 출발하자마자 뜨겁고도 습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화창한 하늘과는 달리 내 얼굴과 온몸에는 호우경보가 발효되고 있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지만 우리에게 있어 더운 바람은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은, 개똥 아니 계륵 그 이상이었다. 비록 그 더운 바람은 땀을 멎게 해 주거나 더위를 식혀주는 효과는 미미했지만, 바람을 맞으면서 이동한다는 산뜻한 경험을 제공했다. 등은 축축하고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는데. 정말 너무너무 더운데! 그늘도 없는데! 그런데 그 속에서도 산뜻할 수 있다는 건 예상밖의 신선함이었다.
자전거에 달린 전기 배터리는 최소한의 노동을 보장해 줬다. 더위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땀(물론 그것만으로도 온몸을 적시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이외에 페달링으로 인해 특별히 더 흘리는 땀방울은 없었다. 걸어 다녔다면 느끼지 못했을 호화였다.
날이 너무 더웠고, 에어컨도 없이 그 더위를 직격으로 맞이해야 했던 우리 둘의 첫 번째 목적지는 미사키. 요론의 대표 빙수집이자 소바 등의 음식을 파는 식당이다.
영화 <안경>을 보면 주인공들이 (미사키의 빙수는 아니지만) 빙수를 먹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주인공이 처음엔 한사코 거절하다가 끝내 먹어보기로 수락을 했던 바로 그 빙수. 그것은 주인공이 요론 밖에서의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요론스러움에 젖어들겠다는 일종의 선언이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빙수는 더위로부터의 구원이자 무더위 속에서 살아남고 오겠노라 하는 출사표와도 같았다.
빙수를 향해 곧장 달려가는데 길거리에 무언가가 보였다. 분명 익숙한데 여기에서 마주칠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그런데 만나고 보니 너무나 그 존재가 자연스럽고 납득이 가는 그런 존재. 바나나였다. 아직 채 익지도 않아서 새파란 바나나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나무가 그냥 길거리에 떡 하니 있었다. 그게 참 신기해서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가만있자, 왜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지가 않지?
내가 상상한 요론에서의 자전거 투어는 시야가 탁 트여서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요론에는 풀숲(?)도 많았다. 그렇게 앞만 보며 빙수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곁눈질로 스쳐 지나갔지만 분명히 보였다. 수풀 사이로 새어 나오는 찬란한 터콰이즈빛 광채가.
수풀을 헤치고 몇 걸음 나아가니 바다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한 걸음씩 더 내디딜 때마다 푸른 광채는 빠르게 커지더니 이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니, 시야뿐만 아니라 내 가슴속까지 그 청량한 바다의 색이 스며들어왔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감각에 숨이 멎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것이 '요론블루'로구나!
이게 요론블루구나!
잠시 거기 멈춰서 있었다. 카메라에 온전히 담기지 못할 그 광경이 못내 아쉬워서 연신 아이폰의 디지털 셔터를 눌러보다가 관두었다. 등이 땀으로 젖었다던 사실도 채 망각하고 바다와 하나가 되어 있을 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아 맞다, 빙수.'
요론 바다를 보러 왔지만 그 광경에만 충분히 젖어있을 만큼 '육체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빙수는 남은 하루 동안 페달이 멈추지 않게 해 줄 연료가 되어줄 것이니.
마침내 도착한 빙수집 미사키.
낡은 외관이 어딘가 정겹다. 주문과 제조를 하시는 중년의 사장님 내외분도 어딘가 정이 갔다. 에어컨이 없이 선풍기가 전부라 실내에 들어가도 더위가 여전한 건 정겹지가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요론답다고 느껴졌다랄까. 그래도 또 하나 반가운 게 있었다. 우리가 전기 자전거를 빌릴 수 있게 통역을 해주신 한국인 일행들이 계셨다.
사실 그들도 첫 번째 목적지가 미사키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남자 둘이 이동하는 게 훨씬 더 기동력이 좋을 것 같고, 이제는 그만 각자만의 여행을 하시게끔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즐거운 여행 되시라며 배웅했었다. 그래도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아까 미처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들에게 빙수를 대접했다. 일단 한 번 거절하고 보는 한국인의 미덕을 보인 끝에 그들은 웃으며 우리의 호의를 받아주셨다.
우리는 1인 1빙수를 했다. 그 날씨엔 그래야 마땅했다. 시그니처 메뉴로 보였던 유리가하마 빙수와 수입산 망고가 아닌 요론산 망고를 토핑으로 얹은 망고빙수를 골랐다. 유리가하마는 요론섬 관광지 중 하이라이트를 담당하는 곳이다. 간조 때 물이 빠지면서 드러나는 바다 위의 백사장 모래섬 같은 곳인데, 그 절경이 우유니 사막을 연상케 하는 곳이다. 유리가하마 빙수는 청량한 요론 블루 위에 펼쳐진 흰모래섬을 잘 표현해 낸 것 같았다. 망고빙수는 말해 무엇하리.
마치 귀이개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디자인의 기다란 스푼을 각자 손에 야무지게 움켜쥔 채 빙수를 한입씩 입에 머금었다. 두 가지 모두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곳에 왜 에어컨이 없는 줄 알겠다. 먹고 있으면 에어컨에 대한 필요는 잠시 잊게 만드는 그런 맛이다.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연료도 든든히 채웠겠다. 이제는 진짜 바다를 보러 갈 타이밍이었다.
가자, 우리를 이끈 영화의 메인 촬영지가 된 해변, 테라사키 해변으로!
영화의 포스터의 이색적인 포즈의 정체였던 '메르시 체조'를 하던 해변이자, 빙수를 먹으며 바라봤던 그 해변.
그곳을 꼭 보고 싶었다.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근데 뭔가 이상하다. 영화에서 봤던 그 해변이 안 보인다. 분명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 곳이었는데. 나무가 우거져 있고 백사장도 좁아서 이곳이 아닌가 했었다. 풀숲이 우거져 있어서 그 너머로 가기가 여의치가 않았다. 그런데 나무 앞에 박혀있는 팻말에는 분명 그곳이 영화 촬영지가 맞다고 쓰여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관리가 안 된 탓이었을까. 맨다리가 다 드러난 반바지로는 도저히 저곳을 넘어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차분하게 요론 관광지도를 펼쳤다. 그곳에 적힌 내용에는 테라사키해안 옆의 투마이 해변이 촬영지라고 적혀 있었다. 이곳이 아닌가 보다 하며 팻말 너머 말고 우측으로 난 내리막 길로 조금만 내려가니 또 다른 해변이 보였다.
당시 우리끼리 결론을 내린 건 그곳이 투마이 해변이고, 촬영지인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당시 시간이 오후 네시반 정도 됐었다) 만조가 되어 백사장이 다 물로 덮였다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 사진도 다시 보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저 수풀 너머가 우리가 보고자 했던 곳이었고 이곳은 촬영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아쉬운 대로 여기에서 해수욕이나 하고 가자며 챙겨 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입수를 하려는데 바닥이 굉장히 거칠고 바위 위로는 조개껍데기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도저히 크록스를 신지 않고는 바닷물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백사장보다는 암석 위주의 해변에 더 가까웠다.
웃통을 다 까고 수영복만 걸친 채 입수라도 하려는데 만조 때라 파도가 꽤 강했다. 수경을 챙겨가긴 했지만 나와 짝꿍을 빼고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 몸을 담그려니 덜컥 겁이 났다. 수영을 배우긴 했지만 바다 수영은 해본 적이 없었고 아무런 안전 장비도, 안전요원도 없는 날 것 그대로의 바다에서 문득 작은 공포감을 느꼈다.
몸만 적신 채 서둘러 해변으로 나와 주섬주섬 옷을 도로 갈아입었다. 여전히 에메랄드빛 일색인 요론의 바다는 내가 느꼈던 두려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여전히 아름다워 보여서 그래서 이상했다. 참나. 순하게(?) 생겨서는 그래도 바다라 이거냐. 괜히 주눅 들지 않았다는 듯 속으로 큰소리를 내본다.
**아래는 구글맵 리뷰에 올라온 테라사키 해변의 사진. 만조도 만조지만 저 수풀 뒤가 확실히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저기가 투마이 해변이었겠지.
그곳엔 딱히 샤워시설도 없었다. 근처 공중 화장실에 샤워를 하라고 갖다 놓은 작은 샤워 호스가 있긴 했지만 어차피 바닷물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소금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냐며 물에 빠진 생쥐마냥 젖은 채로 우리는 숙소로 돌아갔다. 워낙 햇살이 강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물기는 거의 다 마르더라.
숙소로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시원한 에어컨 공기를 맡는데 얼마나 천국이 따로 없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경황이 없었지만 보고 싶었던 해변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은근이 컸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마주한 공포심까지. 괜스레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그대로 숙소에 누워서 남은 시간을 보낼까 하는 충동도 일었다. 그러기엔 아직 밖에 두고 온 미처 경험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많았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짝꿍이 좋아하는 바다 노을을 보면서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서다. 숙소 근처에 마침 노을이 예쁘다는 우도노스 해변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구글맵이 도착을 앞두고는 길을 이상한 곳으로 안내한다. 분명 근처에 다 온 것 같은데 자전거로 가기엔 좁고, 차만 다니는 길로 안내가 되는 것 아니겠나. 시간은 어느새 일몰이 가까워져서 날이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저기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이동을 멈추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수산물 시장을 연상케 하는 항구 쪽이었다. 마침 그곳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짝꿍은 냄새가 나는 것만 같지만 노을이 예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내심 테라사키 해변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은 남아있었나 보다. 거기에 더해 우도노스 해변까지 찾지 못하고 헤매자, 원하던 것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약간의 좌절감마저 밀려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짝꿍의 저 한마디에 그런 감정이 사르르 녹더니 이내 눈앞에 펼쳐진 노을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평소에는 짝꿍보다 내가 더 무던한 편이기도 하고, 계획에 있어서 더 집착도 없는 '무계획형 인간'에 가까운데 말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을 내는 건 짝꿍의 역할에 더 가깝고, 나는 무던히 그것을 들어주는 쪽이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그게 반대로 되는 순간도 생긴다. 그게 참 묘했다. 그리고 노을을 그저 그녀와 함께 보는 그 순간에 온전히 젖어들 수 있었다.
여름 여행의 마무리는 단연코 맥주다. 이 날 마신 오리온 생맥주는 참으로 달고 시원했다.
비록 공짜인 줄 알고 먹은 애기 주먹만 한 감자샐러드가 기본 안주가 아니라 '오토시(자릿세의 일종. 우리나라로 치면 초장집의 상차림 비용)'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었지만. 요론에서의 자전거 투어 첫날을 마무리하기에는 음식도, 직원의 친절함도, 가게의 분위기도 부족함이 없었다.
자전거를 탔다면 헤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원한 공기 속에서 보다 명료한 판단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전거를 탔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우연히 만난 바다, 땀 흘리며 먹은 빙수, 바다의 두려움, 헤매다 만난 노을. 꿀맛 같은 맥주도 그중 하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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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하마,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