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들레 Jan 19. 2021

부끄럽지만, 마케터입니다.

부캐만 많은 내가 본캐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

한 번도 사람들에게 내 "직업"을 말해본 적이 없다.

그냥 "회사에 다닌다" 고 말할 뿐이다.

회사에서 5년째 마케팅 직무를 맡고 있지만

내가 "마케터"라는 생각을 하면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아마 스스로가 진정한 "마케팅"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해서겠지.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신입 공채로 들어가, 마케팅 부서에 배치받고 일한 지 꽉 찬 5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마케팅이 뭔지 잘 모르겠다.



취업 준비 시절, 대학원도 고민해봤고 공무원 준비도 고민했지만 눈 앞에 가장 쉽게 도전해볼 수 있던 것이 대기업 공채였다. 큰 고민 없이 지원했다가 덜컥 붙어버렸기 때문일까. 경영에 대한 모든 것과는 거리가 먼 내가 그렇게 마케팅 직무를 시작했고

한 번도 스스로를 "마케터"라고 여겨본 적 없이

2021년 부로 (무섭게도) 6년 차가 되었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른다고 변명하기엔 6년차는 너무나 무거운 숫자.



물론 "마케팅"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내게 제공하는 금전적인 가치만큼

나도 회사를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한다.

관련된 정보를 취득하려 애쓰고, 소비자 관점에서 생각하기에 바쁘다.



그저 오늘과 내일만을 바라보며 일하기에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 마케터라고 자각한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나를 "마케터"라고 부르는 순간 내 진정한 모습이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운 것 일지도 모른다.



나의 진정한 모습.

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언어 배우는 걸 좋아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학창 시절 내내 - 심지어 전교 1등을 하던 시절에도 - 수학에는 영 젬병이었다.

똑 떨어지는 숫자에는 관심이 없었고, 뭉글뭉글하고 추상적인 것들과 과거의 사람들이 남기고 간 온갖 형태의 글자들에만 노력을 기울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궁금했다. 사람들끼리 어떻게 서로 합의를 이루어 하나의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지 알고 싶었다.



한마디로, 돈 버는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이런 내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쿡 찔러 돈을 버는

마케터가 되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을 일이다.

마케터라는 이름은 내게 안 어울린다고, 분명히 내게 더 어울리는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 이름을 거부한 것도 올해로 5년째이다.

 


하지만 마케팅이라는 직무에도 분명 매력적인 모습은 존재한다. 내가 기획한 광고, 또는 프로모션에 고개들이 반응하는 것. 이것도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 작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꾸 보다 보니 정이 들었는지, 5년을 일하며 나도 마케팅에 조금씩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마케터를 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마케터라는 나의 모습을 "부캐"로 설정하기로 했다.






보통 "부캐"라 함은 본인의 직업 외에 흥미를 갖는 많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마케터"를 나의 부캐로 정했다.

비록 현재 흥미를 느끼고 있다 해도, 그래서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어도, 나의 본모습과는 아직도 거리가 있는 내 직업이 본캐가 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내 진짜 모습을 감추어 주는 가면, 나의 부캐.



그렇다면 나의 본캐는 무엇일까?

내 본캐를 고민하다가 혼란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캐를 많이 양성하다 보면 언젠가 그중 하나가 나의 본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전까지 내 본캐는 "부캐 컬렉터 (collector) " 가 아닐까? 부캐조차 아니었던 "마케터"라는 내 모습이 시간이 지나 부캐가 된 것처럼, 아직은 나의 부캐로 존재하는 수많은 내 모습들이 어느 순간 본캐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이야기는,

부캐 컬렉터인 내가 본캐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자

수많은 부캐들이 양성되는 일지가 될 예정이다. 나와 같이 본캐를 찾아 헤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공감과 위로를 전해줄 수 있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