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정 Jan 03. 2024

로봇을 한다는 것.

그렇다고 엔지니어는 아닌.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적거릴 때였다. 한 로봇 회사의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게 되었다. 평소 '로봇'이라는 키워드로 종종 검색을 하고 있었는데 유독 튀는 검색 결과가 나온 것이다. 채용 사이트에서 종종 보던 기업의 공고가 올라온 것이다. 아무리 계약직 파트타임 잡이라고 하지만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올 것 같진 않았다. 공고를 확인하니 딱 오전 일과 저녁 일 사이에 시간 때에 맞는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을 하게 되면 나는 하루에 14시간을 일한다. 아침에 나가서 밤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역시 이건 무리인 것 같다고 생각했고 아무리 로봇 기업이라고 하지만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까지 올린 거 보면 사람이 안 구해진다는 뜻이고 안 좋은 기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접었다. 


 한 15분 정도만 접었다. 결국 지원했다. 지원할 운명이었다. 내가 N잡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일단 해보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지원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알려준 양식대로 지원하고 기다렸다. 며칠 뒤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회사가 성수에 있었는데 뭔가 올해 성수랑 인연이 깊나 보다. 오전 일을 마치고 면접을 보러 성수(뚝섬 역)에 갔다. 이동 시간이 있으니 합격하고 출근할 때를 대비해 동선도 체크했다. 지도앱으로 찍어본 회사는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회사 앞에서 연락을 드리니 HR담당 직원분이 나오셨다. 얼핏 본 회사는 영화 '인턴'에 나오는 '어바웃 핏'같은 느낌의 회사였다. 회의실에서 면접을 기다렸다. 곧 두 분이 오셨고 가벼운 분위기에서 면접이 진행되었다. 특별히 어려운 질문은 없었다. 이력서에 있는 내용을 최대한 어필하고 묻는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질문에 다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면접은 끝이 났고 나는 나오면서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얼마 안 가 출근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렇다. 나는 점심시간 포함 8시간(점심시간 1시간 30분)을 근무하게 되었다.


 비록 계약직이지만 우연히 본 공고 덕분에 로봇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어버이날이 첫 출근이었다. 회사의 위치는 뚝섬역과 성수역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가는 길 도로 난간 화단에 가득한 꽃들의 향기가 설렘을 보태어줬다. 머리 위에는 성수지선이 지나가는데 이 풍경마저 좋았다. 성수동에 로봇 기업이 꽤 된다고 들었다. 나도 그중 하나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 가는 길에 보이는 카페를 유심히 보면서 어떤 카페의 커피와 디저트가 맛있을까 상상했다. 햇살은 어쩜 이리 좋던지.


 회사에 도착해 자리를 배정받았다. 면접 때 잠깐 보았던 회사 분위기가 이제야 보였다. 흰색 톤의 사무실이었고 가운데에는 앉을 수 있게 소파와 탁자가 있었다. 나는 내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기쁘다.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내 자리가 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책상에는 작은 웰컴 키트와 내 이름표가 있었다. 벌써 이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깔끔하고 넓은 사무실에 휴게 공간까지 완벽해 보였다.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나이도 같아서 금방 말을 놓고 친해지게 되었다. 


 간단히 받은 노트북 설정을 하고 계약서를 썼다. 뭐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점심 식비가 11,000원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요즘 물가가  비싸다지만 11,000원이나 점심 식비로 제공되다니! 나중에 성수동 물가를 생각하면 적당해 보이는 가격이긴 하다. 계약서를 다 쓰고 비밀유지 서약서를 썼다. 지금 한창 성장하고 있는 회사고 기술 유출 문제가 있기에 서약서를 썼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사진을 못 올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업무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일하게 될 팀은 로보틱스 팀이다. 그중에서도 하드웨어를 다룬다. 사무실에서 5분 거리에 연구실이 있다고 한다. 일의 대부분을 여기서 할 것이라고 했고 만들고 있는 로봇도 다 거기 있다고 한다. 연구실을 가는 동안 보이는 관광객들로 인해 내가 정말 성수동에 있구나 실감했다. 도착해 보니 정말 로봇이 다 여기 있었다. 신기했다. 출근 전 인터넷으로 찾아보긴 했으나 정보가 부족했는데 실제로 보니 이게 로봇이구나 싶었다.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봤다. 첫 출근인데 벌써부터 로봇에 애착이 간다. 


 나의 정확한 업무는 로봇을 생산하는 일이다. 생산이라고 하면 어떤 라인에서 생산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그건 양산 단계에서 그렇고 지금은 연구 단계라 그냥 로봇을 말 그대로 만든다(조립한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구품을 조립하고 회로도 납땜하고 PC나 라우터 설정을 하고 테스트도 하며 간단한 소프트웨어도 다룬다. 자재 관리도 하며 연구실 정리도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을 다 만들고 유지 보수하는 일이다.  


 로봇을 한다고 하면 엔지니어의 일이 가장 먼저 생각날 것이다. 회로를 설계하거나 기구를 설계하거나 등 로봇을 연구하는 사람. 그러나 나는 로봇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도면을 보고 직접 로봇을 만들고(조립)하고 회로 납땜도 하고 케이블 배선을 한다. 그리고 유지 보수를 한다. 테크니션(Technician)이나 메카닉(Mechanic)에 가깝다. 언젠가는 엔지니어링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엔지니어든 테크니션이든 결국 로봇을 만든다는 것은 같다. '로봇을 한다'는 말이 좋다. 로봇을 연구한다거나 로봇을 만든다거나 보다 더 포괄적인 뜻이지만 '로봇'이라는 분야에 대한 열정이 담긴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먼저 하게 된 일은 로봇에 들어갈 케이블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구가 정말 많았다. 나의 전 직장은 케이블 및 네트워크 기기 회사였는데 케이블을 유통하기도 하지만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케이블 제작에 자신감을 보였지만 처음 보는 공구와 커넥터였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이렇다. 로봇에 들어갈 케이블을 만들고 그 과정을 매뉴얼화시킬 것. 어쩐지 면접 때 문서작성과 매뉴얼에 대해서 묻더라니. 지금이야 케이블 만드는 게 어렵지 않지만 처음에는 다 그렇듯 매우 서투르고 어려웠다. 계속 실패하고 잘못 결합하고 그랬다. 이제 좀 익숙해지나 싶으면 다른 커넥터로 만드는 케이블이 있어 좌절하게 만들었다. 매뉴얼 작성 때 필요한 사진을 찍지 못해 다시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매뉴얼 작성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노션을 이용했는데 거의 처음 써보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케이블을 만들고 남은 시간에는 매뉴얼 작성에 매달리니 시간은 금방 갔다. 케이블을 만들 때 느끼는 좌절 따위 별거 아니라는 듯 시간은 흘렀고 나의 좌절은 시작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