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통에서 빗겨서지 못한다. 고통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우린 고통에서 벗어 날려고 아등바등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우리 생각이 만들어 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고통에는 크고 작음이 있을 뿐이다. 고통은 인간 영혼과 의식에 늘 존재한다. 다만 행복은 늘 기대에 못 미쳐 작게 보이며, 고통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느낄 뿐이다.
인간은 왜 고통의 짐을 떨치지 못할까? 두 가지만 간추린다. 하나는 대부분의 고통은 개인의 신념으로부터 나온다.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 이 신념을 늘 타인과 비교하기 마련이다. 이로 인하여 불필요한 고통을 창조한다. ‘내가 그래도 저놈보다야 낮지’ 이건 우월함 콤플렉스다. ‘난 열심히 해도 저놈 못 따라가’ 이것은 열등 콤플렉스다.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비교를 통하여 고통을 창조한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에서 개인의 생각과 현실의 불일치에서 나타난다. 저마다의 생각을 현실에서 실행하다 보면 간극이 발생하고 그 틈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 이를테면 개인의 생각과 맞지 않는 질 낮은 직장에 억지로 다니는 갈등. 본인은 죽으라고 헌신하는데 인정해 주지 않는 가족들의 냉정함. 연애시절과 실제 결혼생활 차이에서 오는 간극. 인간관계 다툼에서 오는 실망. 미래를 향해 길을 나섰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은 외로움. 이 모든 게 개인 생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냉정한 결핍이다. 따라서 고통은 강약이 있을 뿐 피할 길이 없다.
거꾸로 질문을 해보자. 고통이 없으면 우리네 삶은 행복할까? 이 역발상의 질문에 쇼펜하우어가 답한다. “사람은 고뇌하기 위해 태어났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방해하는 불행이라는 장애물이 나타날 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제야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가로막는 것과 괴로움을 주는 것을 뚜렷이 느낀다. 그것은 마치 건강한 사람이 건강이라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다가 병든 후에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치이다.” 강물은 좌우로 굽이쳐서 물결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가고, 꽃은 흔들리면서 핀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로 늘 번민과 고뇌에 시달리면서 살아간다. 고통 없는 생은 없다. 고통이라는 장애물이 나타나야 비로소 인간은 살맛이 난다.
휴먼 플레이그라운드(Human Playground)는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놀이의 기원과 발전'을 탐구한 6부작 콘텐츠이다. 제1편 〈고통의 극한점 넘기〉 내용이다. 마라톤〈데 사블레〉는 모로코 남부의 사하라 사막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기이다. 251Km를 6일간 달린다. 매년 1,000명 이상 참가하며, 평균 40명 정도 결승점을 통과한다. 대회 도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람이 발생하기도 한다. 대회 규칙은 낙타에게 추월당하면 탈락이다. 대회에 참가한 에이미 말이다. "실패는 늘 내 뒤에 있다. 낙타가 날 지나쳐 갈까 봐 두렵다" 그녀는 19살에 오토바이 사고로 왼쪽 무릎 아래를 잃었다. 의족을 끼고 대회에 참가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고통 속에 뛰어들었다. 끝없는 모래 둔덕과 물집이 잡힐 만큼 뜨거운 돌 투성이 땅을 달린다. 이건 놀이일지 모르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이 존재한다. 왜 그들은 그 고통으로 들어갈까? 다수의 참가자는 자기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서이다. 극한의 고통을 직면하고도 인내할 수 있다는 것. 에이미는 말한다. “거대한 오븐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열기를 피할 방법이 없죠. 열기는 절 땅으로 내리누르고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빨아들여 버려요. 그 고통이 머릿속 생각 관념을 몽땅 지워버려요. 제가 부족하다고, 아름답지 않다고, 뚱뚱하다고 속삭이는 모든 목소리를. 여기서 더위와 고통을 이겨내면, 전 제 인생 이야기를 다시 쓰려고 해요. 가장 치열한 경쟁 상대는 저 자신이에요. 고통은 제 놀이터예요.”
인간 의지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통을 극복하고 평화스러운 연못처럼 다스릴 수 있다. 무엇보다도 어떤 고통이 내 속에 들어왔는지 파악하고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 이 알아차림이 마음 챙김이다. 이 알아차림은 단박에 깨우쳐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마음을 흘려보내기와 긍정 씨앗을 초대해야 한다. 비움과 이완을 통해 새로움을 채워 넣어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맞이했을 땐,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는지 자학은 금물이다. 이 자학은 인간을 깊은 절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주변 사람에게 고통 나눔을 하자. 술을 먹고 깽판을 치도 괜찮다. 울부짖는 샤우팅도 좋다. 여행도 좋고 수다도 좋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좀 빌리자. 마음속 괴로움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나눔을 해보자. 그러면 스스로 고통의 알아차림은 더욱 또렷해지며, 어떻게 마음 챙김을 할 것인가 깨우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통 내려놓기가 된다.
여기 아름다운 꽃이 있다. 꽃은 시들기 마련이며, 생명을 다한 꽃은 떨어져 거름이 된다. 그 거름은 또 다른 꽃을 피운다.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자연이 순환하듯이 고통은 행복의 거름이 되고, 행복은 곧 고통이 된다. 고통의 이면에는 행복이 자라고, 행복 이면에는 딱 그만큼 크기로 고통의 엔도르핀이 숨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