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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인정 욕망

나를 만나는 길

by 시우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칭찬과 인정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가 “잘 했어!” “오늘 멋져!” “사랑스러워!” 이렇게 말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반면에 “그건 아냐!” “실망이야!” “다음엔 너를 만나는 일이 없으면 좋겠어!”라고 상대방이 말하면, 기운이 쭉 빠지고 비참하여 한동안 넋을 내려놓는다. 이렇듯 타인의 말 한마디에 따라 개개인 존재 가치가 오르락내리락거린다. 내려갈 땐, 그냥 서운함을 넘어서 나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듯하여 적잖은 고통을 받는다.


이 고통은 네가 얼마나 ‘나’로 존재하고 싶은지, 진실로 ‘나의 자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타인의 인정에 매달린다는 것은 그만큼 내 존재가치를 깊이 사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나의 자존감이 얕어서 흔들리는 게 아니라 나의 감각이 예민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더 촘촘하고 진실하게 나만의 삶을 살아가고픈 본능을 가지고 있다. 좋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가다듬는다. 다만 우리들은 타인에게 인정받고픈 욕망을 어떻게 다듬고 세워야 하는지 몰라 때로는 과하게, 때로는 모자라게 경계선상에서 늘 위태롭게 서성일 뿐이다.


성장과정을 들려다 보자.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통하여 세상과 소통한다. 그 울음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다가와 품에 안아줄 때, 비로소 아기는 자신의 존재를 생물적으로 감각하고 체험한다. 아동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아기는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충분히 좋은 엄마의 거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표정과 행동, 말투, 일상생활 태도 통하여 ‘나’라는 존재의 테두리를 조금씩 만들고 그려 나간다. 그래서 인간의 첫 자아는 철저히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가 탄생한다. 그러하니 인간이 타인의 인정욕구에 매달리는 것은 결코 줏대 없거나 나약하거나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공동체를 들여다보자. 우리 모두는 비교 틀 속에서 살아간다. 외모, 학교 성적, 대학 진학, 취업, 연애, 결혼, 자산, SNS 좋아요 구독자 수. 이 항목 하나하나마다 비교평가 지표를 통하여 등급을 매긴다. 그 등급 결과값은 평생에 걸쳐 꼬리표처럼 달고 다닌다. 이 꼬리표는 심지어 종합 만능 지표로 둔갑하여 사람 인격조차 평가하는 게 다반사다. 피로사회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핸드폰을 통하여 타인 반응을 살핀다. 내 게시물에 누군가가 ‘하트’ 눌러줬을 때 짧은 기쁨을 느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약간의 실망을 느낀다. 조금씩 쌓이는 이 실망감이 사회 표준 한계치를 넘지 않도록 날마다 매만진다. 왜냐하면 이 비교우위 틀에서 완전히 외면받으면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살아남지 위해 더더욱 타인 인정을 갈망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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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나’라고 하고, 자아, 에고라고 칭하는 존재 가치의 본질인 ‘나의 자아’를 들여다보자. 실상 자아는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다. 그래서 자아를 이해하기란 쉽지않다. 많은 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자아를 이렇게 정의 할 수 있다. ‘당신 존재의 총체는 누구도 대신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이다.’ 개개인이 자신 자아를 만나는 길은 다양하지만 세 가지를 측면을 살펴본다.


첫째, 내 안의 자아를 만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고독’을 경험해야 한다. 이 고독은 세상을 등지고 홀로 떨어진 외로움이 아니라 스스로 일상 속에서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습관을 말한다. 핸드폰 속 자극적인 동영상 보는 걸 자제하고, 대신에 사색을 하고, 독서를 하고, 산책을 하고, 여행을 하면서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걸 말한다. 이때 고독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신을 채우는 시간이다. 한 모퉁이에서 볼품없이 웅크린 내 모습을 바라보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상처투성인 나를 정직하게 만나서 다독이는 고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타인 인정에 매달려 내 마음의 온기를 데웠다. 그래서 이 고독은 마냥 낯설고 두려우며, 또한 공허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나의 자아의 만남은 바로 이 낯설음 속에서 꽃을 피운다. 타인의 시선이 걷어내고, 아무도 평가하지 않은 공간에 홀로 남을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정직하게 마주한다. 나 자아를 만나는 과정은 완성이 없으며,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지속된다.


두 번째로는 니체가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다’라는 것처럼 내 기존 관념을 망치로 때려 부수는 것이다. 인간은 늘 불완전한 상태로 존재한다. 자연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우리 생각은 늘 ‘완벽’에 머물러 있다. 인간 뇌는 옳고 그름, 좋고 싫음, 흑과 백, 단순 이분법 구조를 선호한다. 그래서 우리 뇌는 ‘완전함’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생각이 만들어 낸 이 ‘관념’을 깨트려야 한다. 착각일 뿐이다. 우리는 결코 ‘완전체 자아'를 만날 수 없다. 배우고, 다듬고, 변화하는 내 자아를 만날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힘은, 완전한 자아를 만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자아를 만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자아는 불통과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나의 진짜 자아와 말과 행동에서 상대방을 배려 하는 태도를 구분해야 한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면 누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고 우리는 흔히 상대방 눈치를 본다. 여기서 ‘눈치를 본다’는 것은 자아와 전혀 다른 결이다. 이것은 단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매너이며, 소통하고자 하는 기본 예의이며 태도이다. 이것은 나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상대방을 대하는 배려와 태도와 매너를 나의 자존심인 양 착각한다.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는 되레 나의 자아를 세우는 한 조각이다.


인간이 천 개의 인정 욕구를 갈망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게 아니다. 문제는 그것에 지나치게 치우쳐 나를 갉아 먹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평가 속에서 온전히 살아가기보다는, 자기 인식속에서 자신만의 매력과 개성으로 살아갈 때 자유로움과 평화를 얻는다. 왜냐하면 타인의 칭찬과 평가는 언제나 바람처럼 흔들리고 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나 자신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는 자립적인 ‘나’를 다듬어라고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지 않는 건강한 자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단해진 ‘나’는 진심으로 타인을 인정할 여유를 갖는다. 상대방 말을 경청하고, 그 성과를 진심으로 칭찬하며, 타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이 마음이 결국 서로의 자존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고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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