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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융한삶 Aug 30. 2024

상처받지 않을 권리

람보르기니



어느날 출근하다가

무시무시해보이는 차를 만났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육중한 디자인에 압도당하는 느낌.

그것은 이 동네에 살면서 일 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차종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람보르기니 우르스라는 녀석이었다.


가격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5배 이상이었고,

유명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는 차였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저 차를 살려면 얼마나 걸릴까.

아니 근데 왜 굳이 비싼 차를 타야 할까.

차가 다 똑같은 이동 수단일 뿐이지 않은가.


이런 합리화를 해봤자,

내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내가 마치 이솝우화 속의

신포도 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행복이 남과 비교하지 않는 데서 온다면,

불행은 남과 비교하는 것으로부터 올 텐데,

우리는 너무 비교하기 쉬운 환경에 살고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타인이 가진 것을 확인함으로써 드러난다.


누가

어디에 갔는지,

무엇을 먹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얼마짜리 건물을 샀는지,

얼마짜리 투자에서 얼마나 이득을 봤는지까지.


알고 싶지 않아도

온갖 방송과 매체, SNS를 통해 쉽게 알게 되는 현실이다.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며, (게오르그 짐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이다. (자크 라캉)


산업자본주의는

허영이라는 인간의 치명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상대적 저소득층은 상대적 고소득층을 동경하고,

그들의 미적 취향과 소비 성향을 닮고 싶어한다.


상대적 고소득층은 상대적 저소득층과의 동일시를 꺼려하고,

그들과 자신들을 구별 짓고자 한다.


계급의 차이는 자신이 처한 물질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그 의식의 내면에는 동일한 대상을 갈망하는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상대적 저소득층 계급은 달성될 수 없는 미적 취향에 대해서

애초에 무가치하다고 폄하하기 쉬운데,


이로부터 신포도 전략이라는

자기 위안 혹은 자기 변명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로 인한 상처가 발생한다.


돈이라는 신.

자본주의라는 종교.

내세가 아니라 현세의 쾌락을 보장하는 신.

그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신도들의 소망과 기대심리.


돈 페티쉬.

과시와 허영.

구별짓기의 욕망.

황금부족증 히스테리.

새로움에 대한 반복 강박증.


현란한 차이의 공간, 끝없는 자극의 공간.

도시에서 살아남기가 특히나 쉽지 않은 이유다.

모두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게 된다면

시장은 축소될 것이고,


공급 과잉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산업 자본주의는 존속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로 소비자를 물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광고하고,

욕망을 부추기고,

과시를 권장하고,

허영에 불을 붙일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계속해서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 거대 매트릭스 속에 살면서,

무의식적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산업 자본의 무력한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 시스템에 대해

어느정도는 이해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이해할 만큼 지혜로워지기 전까지

고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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