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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다고래 Sep 11. 2023

여기가 치앙마이의 김밥천국인가요?

대출은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지난밤, 익숙하지 않은 골목 소음과 더위에 잠을 설치고 늦잠을 자고야 말았다. 재빨리 노트북을 열어 회사 메신저부터 확인해봐야 했지만 내 몸은 이미 커튼을 열어젖히고 베란다로 나가있었다. 분명 우기라고 했는데 거짓말처럼 하늘은 새파랗고 해가 쨍쨍했다. 뷰는 기대도 안 했는데 골목길과 수많은 전깃줄 너머 공터에 여름 나라 특유의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있었고 내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예쁜 빨간 꽃들이 펴있었다.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인데 그 나무 한그루가 여름 나라에 왔음을 알려주었고, 여름 나라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는 어제의 불안은 내 것이 아니었던 것 마냥 입이 또 귀에 걸렸다. 다시금 실감 났다. 아아, 와 버린 것이다. 정말 와 버린 것이다, 행복의 나라로!


 오전 업무를 후다닥 보고 점심도 먹을 겸 노트북과 필요한 갖가지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거리로 나섰다. 어제 목숨 걸고 물을 사러 가는 것처럼 느껴지던 캄캄하고 좁은 인도는 예쁜 가로수가 곳곳에 심어져 있는 동네 골목길일 뿐이었다. 곳곳에 가지를 사방으로 뻗고 족히 몇십 년은 살았을 커다란 나무, 쨍한 색감을 자랑하는 꽃들, 힙한 카페로 가득 찬 도시의 얼굴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님을 실어 나르는 빨간 성태우와 더운 날씨에도 긴팔과 긴바지, 헬멧까지 무장한 그랩 기사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쌩쌩 지나갔다. 태국에 왔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숙소 근처에 김밥천국과 유사한 식당이라고 리뷰되어 있는 곳을 찾아갔다. 문제는 간판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구글 맵은 내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엄청난 길치여서 현재 위치를 따라가지 않고서는 지도 앱이 무소용인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김밥천국처럼은 안 느껴지는데? 그래도 길치인 내가 구글 맵 말을 당연히 들어야지. 실내가 아니라 더운데도 테이블이 거의 다 찬 거 보니까 그래도 맛은 있나 보군, 혼잣말을 중얼중얼 거리며 들어갔다.


 일단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찾았다. 분명 메뉴가 몇십 개는 된다고 했는데 이상하다. 메뉴가 닭과 솜땀밖에 없다. 닭은 한 마리 먹을 건지, 반마리 먹을 건지, 혹은 어떤 부위만 먹을 건지 선택할 수 있고 솜땀은 여러 변형이 가해진 메뉴들이 있었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니 김밥천국인데 사람들이 온리 치킨만 먹고 있다. ‘확실히 이상하군, 어쩌지, 나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 찰나 재빠른 종업원은 벌써 무엇을 주문할 것인지 물어보고 있었다. “죄송한데 여기가 김밥천국 태국 버전 아닌가요? 아니라면 전 거길 찾아가야 할 것 같아요, 아침부터 닭을 어떻게 뜯나요?” 그렇다, 이런 말은 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당황하지 않은 척, 눈앞에 보이는 메뉴를 대충 시켰다. 닭날개, 목 같은 건 잘 못 먹으니 선택권도 없다. “닭은 반마리 주시고요, 솜땀 제일 위에 있는 거 하나 주세요.” 종업원은 고개를 한 번 까딱하더니 바로 자리를 떠났다.


 내가 아무리 치킨을 좋아한다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아침부터 더군다나 어제 저녁도 제대로 안 먹었는데 부대끼게 바로 단백질을 이렇게 집중투하할 수는 없단 말이다. 더군다나 솜땀은 십여 년 전에 라오스에서 먹은 후로 처음이었다. 요 근래 동남아 음식도 많이 먹지 않은 탓에 피시소스는 물론 여러 향신료와 낯을 가리게 된 나는, 솜땀은 좀 나중에 먹기로 혼자 정해둔 터였다. 마음도 위도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주문한 지 5분 만에 음식이 눈앞에 탁탁 놓였다. 닭 옆에는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겠는 거무죽죽한 소스가 놓여 있고, 솜땀은 나오자마자 특유의 향이 코를 강하게 찔렀다. 3초 정도 뇌정지가 왔다. 그래도 나는 이미 여기 왔고, 소심해서 잘못 왔다고는 말을 못 하고 주문도 했고, 더워 죽을 것 같은 불지옥이지만 갓 나온 음식을 버릴 수는 없으니 먹어야 한다. 나의 길치 능력과 소심함 콤보를 가볍게 원망하며 반강제로 첫 번째 닭고기를 입안에 욱여넣어 보았다. 세상에? 존맛탱. 기름이 쫙 빠져서 담백하고, 살은 촉촉 그 자체고, 닭껍질을 싫어하는 나조차도 껍질 더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쫜득쫜득하다. 오, 이제 신뢰를 가지고 거무죽죽한 소스에 닭고기를 찍어 입에 넣어본다. 세상에? 개존맛탱. 분명 진짜 먹기 싫었는데 왜 이렇게 맛있지? 자신감을 가지고 서둘러 솜땀으로 젓가락을 향했다. 박수가 나온다. 닭을 두 세입 먹다가 목이 좀 막히시나요? 솜땀을 한입 하시죠. 마치 첫 입처럼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내 온몸에 흐르는 땀이었다. 선풍기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오랜만에 동남아의 오픈형 식당을 온 나는 센스 없게도 바람 한줄기 느낄 수 없는 구석에 앉았다. 중간쯤 먹다가 이렇게 계속 땀 흘리며 먹다가는 더위 먹는 게 아닐까 했는데, 옆 테이블에서 함께 닭다리를 뜯던 현지인이 조용히 일어나 얼음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뒤를 돌아보니 얼음이 한가득 들어있는 아이스박스와 플라스틱 컵이 놓여 있었다. 오, 코쿤카(감사합니다) 얼음이여. 얼음물을 가득 떠서 꿀꺽꿀꺽 마시고, 남은 닭을 순삭 했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에게 가서 계산을 했다. 이제 나에게 남은 임무는 하나였다. “대체 저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식당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자 사장님은 뭐라고 뭐라고 두 글자를 말했다. 가게 앞에 나와 구글 맵에 검색해 봐도 그 이름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현재 위치를 다시 찍어보니 한국어로 '위치안부리'라고 나온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여기가 그렇게 유명한 위치안부리 로스트 치킨이구나.‘ 소박하게 김밥천국 가려다가 현지인/여행객 맛집을 얻어걸렸으니 이런 개이득이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웨이팅도 없었고, 메뉴가 품절이지도 않았다. 치앙마이 첫끼부터 이렇게 운이 좋아도 되는 걸까? 한국에서의 조급하고 신경질적이던 마음이 조금은 녹아 사라지고, 아무 계획도 없이 와서 우연히 마주치는 이런 기쁨이 잊혔던 얼굴을 보여 준다. 그래, 이래서 나는 여행 올 때 계획 없이 오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었다. 첫날부터 아무래도 치앙마이를 정말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온몸을 채우고, 노트북을 들고 일하러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해도, 줄줄 흐르는 땀도 왜인지 모두 싱그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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