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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다고래 Jan 30. 2024

Welcome to the North

대출은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다시 가려고 해도 가볼 수 없는, 이름 모를 랍콰이딥 식당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그는 조금 생각하나 싶더니 곧이어 시원하게 대답했다, "랍콰이딥."

한국 여행자들 채팅방에는 다 가보지도 못할 만큼 많은 식당과 요리 추천이 매일같이 올라온다. 그런데도 랍콰이딥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게 도대체 뭐냐고 곧장 물어본다. 이번에는 미간을 찡그리며 한참 고민하더니 "raw buffalo." 라고 한다. 버팔로? 버팔로를 생으로 먹는다고? 대뜸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생글거린다.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은지 짓궂은 얼굴로 "raw buffalo face." 란다. 추천하는 음식은 무엇이든 먹어보겠다고 호기롭게 물어봤던 나는 머리에 작은 지진이 난 것 같다. 그 누구의 얼굴도 먹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본능이 느껴진다. 내 얼굴이 심각해지자 그는 재빨리 웃으며 손사래 친다. "raw buffalo, just beef, beef." 라며. 그제야 긴장이 누그러진다.


 대체 이걸 어디서 먹어본담. 시티 내 식당에서도 본 적이 없어서 어디에 가야 먹을 수 있냐고 다시 물어봤다. 그러자 옆에 앉아 우리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드러머와 한참을 이야기하고는 구글 맵을 보여준다. 냉큼 내 구글 맵을 열어서 여행 계획 장소에 저장했다. 시티에서 좀 떨어진 가게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까짓것 가서 먹어보지 뭐. 다음날, 랍콰이딥 먹으러 갈 생각에 꿈쩍 않고 일하고 있는 내게 하늘이가 물을 건네며 쉬엄쉬엄하라고 한다. 마침 목이 탔던 나는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나 퇴근하고 곧장 랍콰이딥 먹으러 갈 거야." 라고 선언한다. 늘 차분한 하늘이는 짐짓 놀란 얼굴이 되었다. '랍콰이딥을 어떻게 알았지?' 하는 눈치다.

"raw buffalo face라고 했다가 농담이라던데 설마 진짜 얼굴은 아니지?"

하늘이는 불안해하는 내 얼굴이 웃겼는지 크게 웃어 젖힌다. "당연히 아니지, 그냥 생고기 요리야." 라며 나를 안심시킨다. "랍이 북부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양념 중 하나야." 라고 깨알 같은 설명도 덧붙인다.

가장 유명한 식당도 보여주었는데 하늘이도 거기서 먹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가게 오픈이 9시인데 9시 10분이면 이미 랍콰이딥은 동이 난다는 것이다. 느긋해 보이기만 하던 치앙마이 사람들도 오픈런을 하는구나. 소중한 반차를 쓰지 않으면 먹어볼 수 없다니 아쉬운 마음에 구글 맵에 저장만 해두었다.


 후다닥 일을 끝내고 상기된 마음으로 택시를 불렀다. 그가 추천해 준 식당은 공항을 조금 지나 도시 외곽 쪽에 있었다. 치앙마이도 퇴근시간이라 자동차가 영 잡히지 않아서 오토바이를 불렀다. 그래봤자 20여분 거리이긴 하지만 아직 시티를 벗어나 그렇게 멀리 가본 적은 없어서 조금 겁이 나는 참이었는데 하늘이가 바깥까지 나와 오토바이를 많이 안 타봐서 무서워하니 천천히 가달라고 부탁한다. 드라이버 아저씨와 나의 '천천히'가 서로 다른 탓에 나는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지만 랍콰이딥 하나만 생각하며 손잡이를 더 꽉 잡고 버틴다. 그렇게 달린 끝에 꽤 큰 식당에 도착했다. 서둘러 택시비를 내려고 하는데 드라이버 아저씨가 식당을 자꾸 가리킨다. 태국어를 못 읽는다고 하니 계속 "클로즈, 클로즈. (닫았어요.)" 라고 하신다. 구글 맵도 오픈 중이라고 하고, 식당 안에도 저렇게 태연하게 TV 보는 사람이 있는데 휴무라니? 의아한 나는 휴무라는 현실을 잠자코 받아들일 수만은 없어 드라이버 아저씨한테 "하지만 저기 사람이 있어요." 라고 소심하게 항변해 본다. 그러자 아저씨는 식당 주인아저씨로 추측되는 사람에게 재차 물어봐준다. TV를 보고 있는 식당 주인아저씨는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대답하시더니 곧장 TV로 시선을 돌린다. 치앙마이에 온 지 거의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무언갈 먹을 기대에 잔뜩 부풀어서 아침부터 식당 문 닫기 전에 오려고 일도 모두 당겨서 했는데 이런 결말이라니. TV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식당 주인아저씨 뒤통수가 야속하다.




 나는 어딜 찾아가서 뭘 먹거나 맛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내가 오토바이까지 타고 20여분을 벌벌 떨며 왔는데 문을 닫았다니? 오기가 발동한 나는 고민 끝에 드라이버 아저씨에게 묻고야 만다. "랍콰이딥 좋아하세요? 아저씨는 어디서 드세요? 거기에 데려다주세요." 아저씨는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정말 가고 싶냐는 표정이다. 나도 불안한 표정을 숨길 수는 없다. 서로 미심쩍은 눈빛을 교환하다 결국 내가 먼저 꼬리를 내린다.

"식당 이름을 말해주시면 구글 맵에서 검색해 볼게요."

아무리 웬만한 식당에서 다 먹을 수 있다고 해도 나도 걱정 하나 없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런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구글 맵에서는 안 나온다." 는 대답만 돌아온다. 그렇다, 다시 한번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수가 없다. 막상 갔는데 무서워서 못 들어가겠으면 어쩌지, 이 아저씨가 어디로 갈 줄 알고 막 믿어도 될까 등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다. 용기를 내자, 나는 1분 정도 고민하다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I'll take my chances."


 아저씨는 내가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자마자 핑강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큰 순환도로를 돌아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동네들을 지나쳐 가는 동안 내 마음은 또 시티로 돌아가는 게 맞았던 것 아닐까를 고민하며 오락가락하느라 바빠진다. 심지어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더니 머리와 옷이 젖는 게 느껴질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무슨 대단한 음식을 먹어보겠다고 이렇게까지 가는 건가 싶긴 한데 빗길에 오토바이가 미끄러질까 봐 겁이 덜컥 나기 시작하니 다른 잡념은 금세 자리를 잃는다. 다행히 비가 더 심해지기 전에 아저씨가 멈춰 선다. 비가 너무 많이 오니 잠깐 쉬었다가 가려나보다 막연히 추측했던 나는 아저씨의 도착했다는 손짓에 망연자실해진다.
"네? 여기요?"

"네. 랍콰이딥."

나는 곧장 시티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하다. 확실한 것은 지나가면서 봤다면 식당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막과 나무판자 몇 개와 대충 세워놓은 나무 기둥 몇 개가 있다. 그래도 단골집에 데려다준 아저씨나 식당 주인에게 무례하고 싶지 않아 엉거주춤 들어가 본다. 부엌이 보이긴 하는데 왜 냉장고가 없는 거 같을까. 조리도 안 하는 요리를 먹으러 왔는데 냉장 시설이 안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사람을 매우 심란하게 한다. 입구를 지나니 흙바닥 위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보인다. 영어 메뉴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영어가 통하기만 해도 감사할 지경이다. 식당 주인을 비롯하여 부엌에서 일하시는 분들, 식사 중이던 손님들의 이목이 쏠린다. 나를 보고는 뭐라고들 대화를 나누시는데 유일하게 아는 단어만 내 귀에 꽂힌다. "콘까올리. (한국사람이야.)" 그래요, 저도 제가 한국에서부터 여기까지 어쩌다 오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식당 주인아저씨가 사진이 일부 있는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다행이다, 사진이 있다. 문제는 사진을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지만. 나는 "랍콰이딥?" 이라고 물어본다. 이쯤에서 하나 고백할 것이 있는데 내가 아무리 태국어 단어를 공부해서 써먹어 보려고 해도 현지분들은 잘 못 알아들으신다는 것이다. 발음, 성조 무엇 하나 제대로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내가 아무리 '랍콰이딥'이라고 말해도 단번에 '랍콰이딥'이라고 알아듣는 분은 없다. 식당 주인아저씨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구글에서 사진을 검색해서 보여드리니 "아, 랍콰이딥" 하며 손으로 어떤 사진을 가리키신다. 음, 구글 사진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랍콰이딥이라고 하니 일단 하나 달라고 한다. 찹쌀밥과 만만해 보이는 계란 요리도 하나 시킨다.


 우리나라의 반찬처럼 작은 그릇에 주문한 요리들이 나온다. 랍콰이딥이 나왔다. 나왔는데 먹지를 못한다. 실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며 배탈이 날 만한 비주얼인지 아닌지를 가늠해 본다. 뒤이어 나온 계란 요리는 그래도 조리를 했으니 안전해 보인다. 우선 계란 요리 한 입 먹어보고 생각하자. 계란 요리를 한 입 먹고 찹쌀밥도 한 입 먹는다. 맛있다, 괜찮다. 랍콰이딥으로 젓가락을 향하는데 여전히 선뜻 먹기 어렵다. 다시 한번 계란 요리를 한 입 먹고 찹쌀밥도 한 입 먹는다. 그렇게 랍콰이딥을 먹으려고 시도만 하는 사이에 계란 요리는 다 먹어버렸고 찹쌀밥도 밑바닥이 보인다. 다시 한번 여기까지 온 여정을 머릿속으로 되짚는다. 그렇게까지 해서 먹겠다고 왔는데 이제 와서 쫄보처럼 포기할 것인지 머리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다. 배탈 한 번 난다고 해서 죽진 않으니까 먹어보자,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온 랍콰이딥 광인이 승리했다. 쫄보처럼 굴지 않기로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쫄보이므로 조심스럽게 정말 밥 한 톨만큼만 랍콰이딥을 떠서 입에 넣어본다.


 "어?" 나도 모르게 놀란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이것은 어디선가 먹어본, 심지어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맛이다. 양념에 가려져서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 고기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난다거나 하진 않는 걸 보니 배가 아플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안심한 나는 조금 더 크게 떠서 다시 한번 맛을 본다. 태국 요리 특유의 향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내가 먹어본 맛이다. 생각보다 매워서 입을 씁씁- 하며 찹쌀밥과 같이 먹으니 밥도둑 조합이다. 아 그렇구나! 이것은 밥도둑 조합이다. 육회에 양념게장 양념을 비벼놓은 맛!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양념게장 양념에 태국 향신료가 절묘하게 섞인 맛! 치앙마이에 와서 양념게장 맛을 먹어보게 되다니. 그동안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음식이라도 먹어볼 것처럼 굴었던 시간을 되짚어보니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진다. 대단히 무서운 음식도 아니었는데 어젯밤 버팔로 고기니 뭐니 할 때부터 왜 그렇게 유난을 떨면서 긴장한 건지. 하여튼 쫄보인 건 알아주어야 한다. 다시 한번 씁씁 소리를 내며 시원한 콜라까지 한 모금해 주니 그간의 우려가 한 번에 싹 내려간다.




 "아 맞다, 나 랍콰이딥 먹어봤어."

"하하, 맛있지? 카오쏘이랑 고기국수는 너무 베이직이야."

"응. 랍콰이딥도 완전 쉽던데?"

랍콰이딥을 입에 넣기 전까지 벌벌 떨었던 모습은 모두 생략해 버리고 그 앞에서 제법 센 척을 해본다. 옆에 앉아 있던 밴드 멤버들은 내가 대뜸 "랍콰이딥"이라고 할 때부터 왁자지껄 웃기 시작한다. 다음날 하늘이도 내가 들어서자마자 "랍콰이딥은 어땠어?"라고 묻는다. 나는 신이 나서 "내가 그걸 먹으러 갔었는데 문을 닫아서 말이지." 하며 쫑알쫑알 한참 이야기를 풀어낸다. 음식 하나로 왠지 치앙마이 사람들과 한 뼘쯤 가까워진 느낌이다. 처음 랍콰이딥이라는 음식 이름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은 순백의 백지였는데 이제는 나도 떠오르는 것들이 생겼다. 그들이 좋아하는 양념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음식 이름을 들으면 달달한 듯 맵싹 해서 식욕을 돋우는 맛도 혀 끝에 맴돈다. 랍콰이딥을 먹으러 가기 위해서 했던 나만의 작은 모험 이야기도 하나 생겼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미지의 영역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고 나도 그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기분이다. 고작 같은 음식 한 번 먹어봤다고 이런 기분이 들다니 어쩌면 꽤 먼 길을 가고 줄을 서서 무언가를 먹어보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들에게 더 가닿고 싶을 때 조금 겁이 나도 기꺼이 다시 용기 내겠다, 고 조용히 다짐해 본다.

"오늘도 일이 많아?" 하늘이가 묻는다.

창밖 골목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느릿느릿 열어 일할 준비를 하며 대답한다. "매일 똑같지 뭐." 조만간 또 새로운 음식을 먹어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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