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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다고래 Sep 11. 2023

치앙마이에서의 첫날밤

대출은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한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언젠가부터 더 이상 긴 비행시간은 설레기보다 움직이지 못해 아픈 관절만 남겼는데 5시간 반은 그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업무를 마치고 허겁지겁 탑승한 탓에 영화, 책은 커녕 들을 음악조차 다운로드 받아놓지 못한 나는 5시간 반동안 나의 생각과 갇혀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 떠있는데도 ‘진짜 가도 되는 것일까’, ‘가서 뭘 해야 그래도 합리화가 되는 것일까’ 등의 생각이 돌고 돌아 머리끝까지 피곤에 절여진 기분이었다. 이미 근 일 년을 번아웃과 무기력으로 손가락 하나 드는 것도 수고스럽던 나는 이미 더 이상 오늘을 마주할 힘이 없었다. 하루도 상대할 기운이 없는데 한 달이라는 시간을 알차게 써 보려니 정신이 아득했다. 그렇다 보니 낯선 장소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그저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착륙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래서 나는 치앙마이 공항에 발을 디디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하지 못한 채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여름나라 특유의 덥고 습한 공기가 훅하고 나를 덮쳤다. 짜릿했다. 구겨진 관절도, 지긋지긋한 고민과 걱정에 주눅 든 마음도 주름 하나 없이 펴지는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밤에 도착했는데 온 세상이 다 빛나보였다. 막상 도착하니 인천공항에서부터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정말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이 둥둥거리며 내 귀 옆에서 울렸다. 공항은 아주 작고, 사람도 그다지 붐비지 않아서 헤맬 것도 없었다. 수하물을 찾아 곧장 볼트를 불렀다. 기사님이 데리러 오기까지는 10분 정도의 대기 시간이 있었다. 적당히 땀이 흘러 옷이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불쾌했겠지만 씻고 싶기보다는 여름나라에 왔다는 실감이 들어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반갑기만 했다. 정확히 어떤 것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익숙하지 않은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딱히 구경할 것도 많지 않은 공항 안팎을 돌아다녔다. ‘정말 와버렸다, 혼자 와버렸어.’ 하는 생각에 웃음이 연신 터졌다.


 겁쟁이인 내게는 다행이게도 첫 볼트 기사님은 친절한 여자분이셨다. 그녀는 한 달 동안 지낼 무거운 짐을 트렁크에 함께 실어주고는 웃으면서 ‘Welcome to Chiang Mai.’ 라고 인사를 건넸다. 짧은 말 한마디에 마치 치앙마이 전체가 나를 반겨주기라도 한 듯한 착각에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 덕분에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십여분 남짓, 치앙마이의 밤거리를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간간히 조명이 켜진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두웠고, 대로에는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실컷 보게 될 노란 조명을 받아 예쁘게 빛나는 해자를 처음 보았다. 이렇게 도시 한가운데에 네모난 해자가 있다니. 그간 여러 동남아 국가를 다니며 느낀 익숙한 느낌과 낯선 풍경이 한데 섞여 들어갔다. 지금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고 경직된 마음이 한결 풀어졌다. 온 것만으로도 해야 하는 일은 100% 완수한 것 같은 기분.


 막상 숙소에 도착해서 텅 빈 스튜디오를 보니 대체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아늑한 우리 집과 푹신한 침대에 누워 단잠을 자고 있을 사랑하는 남자가 떠올랐다. '그 모든 걸 두고 나 혼자, 어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이곳에 왜 온 거야.' 다시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워졌다. 처음 보는 골목길과 읽을 수 없는 글자들. 지금 편의점에 물이라도 사러 나가도 안전할지, 집 근처에 대마 가게가 있는 걸 왜 확인 못 한 것인지, 갑자기 벌레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콘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 건지, 샤워 필터는 바꾸자마자 갈색이 돼버렸는데 계속 써도 될지 따위의 온갖 자잘한 걱정과 두려움, 의문, 나에 대한 원망이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환장할 것 같지만 이미 나는 치앙마이에 왔다. 더군다나 한 달이나 지낼 것이다. 찜찜함에 비치 타월을 침대에 깔고 누워 어둠을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 일어나서 하늘이 맑으면, 지나가다 먹은 음식이 맛있으면, 누군가 친절하게 미소 지어주면, 여기에도 정이 들겠지'. 그런 생각이 나를 다독였다. 나는 시간이 조금 흐르면 결국 이곳을 소중하게 여길 거라는 걸 알만큼 나와 오랜 시간을 살았다. 한해 한해 나이를 먹는 것이 억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내가 나에 대해 조금 아는 것이 큰 위로가 되어주는 밤이면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구나 싶다. 그렇게 흥분과 불안, 걱정과 피곤, 이름표를 붙이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이 서로 엉켜 붙은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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