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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떼 Nov 29. 2023

빤스런한 썰들 푼다(1)






 살면서 도망친 순간들이 여러 있다. 호기롭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나와 맞지 않았다거나, 혹은 본격적인 일을 하기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거나, 혹은 버티는 게 힘들어 도망쳤다. 처음에 나는 도망쳤다는 그 사실 때문인지 마냥 기분이 편하거나 시원하지는 않았다. 내가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에 되려 찜찜했다. 남들은 잘만 버티던 걸 왜 나는 버티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그 생각들은 나를 비겁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여기서 못 버티면 다른 곳 가서도 못 버틴다'라는 말은 회피의 결과가 결코 긍정적이지 않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겠다. 처음의 나는 도망친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낙인찍으며 여기서 버티지 못한 내가 다른 곳에서도 버틸 수 있을까,라는 부정적인 사고에 잡혀 나 자신을 갉아먹었으나, 어느덧 삼십 대가 된 나는 이제는 안다. 내가 지금껏 했던 회피들은 또 다른 기회가 되었고, 이는 더 좋은 결과를 가졌음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에는 정답이 없고,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고, 도망을 선택한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구박하기보다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도망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 결과는 '알고 보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나의 첫, 도망은 스무 살의 호주워킹홀리데이였다.

 고2 당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오빠가 나와 쌍둥이 여동생에게 대학을 바로 가기보다는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가지 않겠냐고 했다. 이미 워킹홀리데이비자와 학생비자로 호주에서 몇 년 거주했던 오빠의 제안이었고, 오빠 역시 호주에 있을 거라는 말에 부모님은 마음 놓고 우리를 호주에 보내기로 하셨다. 하지만 그 속에는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에 두 명의 등록비를 감내야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도 한 몫하셨던 거 같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 역시 그러했다. '호주'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캥거루와 코알라밖에 없었던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이 아닌 호주를 선택했을 땐, 수능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응큼한 생각이 한 몫했다. 거기다가 성적마저 좋은 편이 아니었으니 '호주 워킹홀리데이'라는 핑계를 앞장 세워 수능에 해방될 수 있었고,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자마자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호주에 갈 수 있는 비용을 모았고, 나와 동생은 아르바이트로 모은 비용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비자를 준비하여 학교 졸업식도 가지 않은 채 호주로 떠났다.  



 이것이 바로 나의 첫 도망이었다. 대입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만으로 떠난 그곳에서의 삶은 마냥 평탄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난 이 도망을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었다. 비싼 물가와 방세, 그리고 부모님께 돈을 보내드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하루에 8-12씩 일하면서 돈을 벌었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무도 없는 깡 시골로 내려가 공장 생활도 했었다. 오전 5시에 기상하여 함께 일하는 언니 오빠들과 함께 봉고차를 타 공장에 도착해 일을 하면서 힘들기도 했었지만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상황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통해 나는 생활력을 얻었고, 등록비를 벌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며 지금 내가 호주에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간 호주에 살면서 변화된 나는 분명 성장했으며, 그 성장을 발판 삼아 국립대에 들어갔고(지방이지만), 나름 열심히 취업준비를 하여 서울에 있는 회사에 입사하기도 했다(한 달 만에 바로 퇴사했지만). 이것이 나의 첫 도망이자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기회였다.





두 번째 도망은, 첫 입사한 회사였다.


 남들보다 뛰어난 학력이나 자격증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취업준비를 했던 거 같다. 중국 관련 전공에 따라 HSK 6급, 영어 토익 890점, 컴퓨터활용능력 2급, 한국사 1급, 무역영어 1급을 취득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현재의 남편과 호주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컸고, 호주를 가기 위해선 부모님께 나는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 안심시켜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자격증 공부들을 하였고, 서울에 있는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사회초년생에게 사회는 참 쓰디썼다. 7군데 정도의 회사들을 면접을 봤었는데, 그 회사들은 규모도 연봉도 나를 평가하는 방식도 모두 달랐다. 처음으로 면접을 봤던 회사는 다 쓰러져가는 빌딩에 사무실이 있었고 규모도 가장 작았다. 하지만 면접은 겉치레는 화려했음에도 질문들은 하나같이 실속이 없었다. 말 한마디에도 꼬투리를 잡는 식의 압박 면접을 시도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 질문 의도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아 압박감을 느끼지 조차 못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나는 불합격을 받았다. 당시에는 이런 곳에서도 합격하지 못하는 내가 더 나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을까, 하며 자존감도 떨어졌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지 않나 싶다.



 그리고 두 번째 면접을 본 회사는 규모는 작았지만, 앞으로도 성장할 회사처럼 보였고 배울 점이 많아 보였고 내가 만족할만한 연봉을 제시해 줬다. 거기서 난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었지만 한 시간 후, 유력 후보였던 사람으로부터 뒤늦게 연락을 받아서인지 미안하지만 입사를 못 시킬 거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미 가족들이랑 친구들에게 한참 자랑을 다 한 뒤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대표님은 정말 미안했는지 현재 회사 규모로 두 사람을 뽑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케이크 모바일 쿠폰까지 보내주셨는데, 사실 그게 더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저렇게 까지 사과하는데 어떻게 욕을 하랴. 그래서 원망 못할 무언가를 잡는 대신 이불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또 어떤 회사는 면접 중에 자기 자랑만 열심히 하면서 나에게 악담을 했던 대표가 있었고, 어떤 회사는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의 낮은 연봉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또 그와 반대로, 내가 다른 회사에 입사했다고 하니 연봉을 더 올려줄 테니 자신의 회사로 입사해 달라는 곳도 있었다. 나는 똑같은 사람이었고, 똑같은 조건을 가졌지만 나를 평가하는 방식이 모두 달랐고, 평가하는 회사들의 규모도 모두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가 입사했던 회사는 내가 만족하는 기준을 다 충족하는 회사였다.



 연봉, 회사 규모, 회사 위치 모두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입사 동기들과도 친했고, 회사 적응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사수가 다른 곳으로의 파견근무할 예정이라 사수의 일 마저 내가 다 맡게 되면서 많은 업무량과 함께 배워야할 일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점심시간에 일하는 것도 부족해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일을 했고, 야근을 했는데도 일이 줄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맡은 일을 다 하지 않았다고 혼이 나기도 했다. 그래, 맡은 일을 다하지 않았으니 혼이 날만 하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봐도 사수가 2년간 했던 업무를 일주일 밖에 안된 신입인 내게 몰아붙인다고 될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거기다가 나보다 두 달 일찍 들어온 다른 팀의 사원은 두 달 내내 주말에도 나와서 일을 했다고 하니, 더더욱 회사에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야근이 없다는 그 회사는 알고 보니 야.근.수.당.이 없는 회사였고, 야근을 근절하는 회사이지만 개인당 업무량이 많아 자진해서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때의 내 자리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짧게 거쳐간 자리였음을 알게 되면서, 그 이유가 왜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회사의 부정적인 순간들이 내 속에서 쌓여갔고, 그 상황에서 '어차피 나는 호주에 가서 살 건데 이 회사생활은 무엇을 위한 일인가. 호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퇴사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곳이 내가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그만둘 곳임을 알기에 미련은 없다. 하지만 당시의 내가 버티지 못했다, 혹은 버티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오래도록 찝찝하게 만들었다. 저 정도의 회사 생활은 버텨야 하는데, 난 이번에도 '호주'를 핑계로 버티지 못하고 도망친 거였다. 그래서 당시의 나는 '버티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된 거 같아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백수가 되었고, 며칠 후에는 호주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기 위해서 스타벅스에서 일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커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나는 그때의 다짐처럼 정말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고, 정말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다. 아직 바리스타로서 부족함은 많지만 여전히 커피에 대한 애정이 크고, 바리스타로서의 성장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그때의 퇴사 결정이 후회가 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커피를 시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까움, 혹은 그때서라도 일을 그만두고 바리스타를 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당시에는 도망치듯 결정한 선택이 내게는 바리스타의 길로 오게 한 계기가 되었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망’이라는 단어에서 ‘기회’를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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