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을 말하죠. 대상을 보고 대상을 느끼고 대상을 찍습니다. 응시는 선택된 대상과 시선이 교차되고 존재자를 발견하는 것이죠. 대상은 빛에 의해서 나타나고 반사되어 보이게 됩니다. 이 연속 과정에서 대상에게 단지 시선만 보내지 않죠. 응시된 대상은 나의 인식과 만나게 되고 정보의 합을 통해 의미가 나타납니다. 이런 의식 작용은 끊임없이 대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하죠. 어제 보던 대상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의식 작용을 거치느냐가 발견으로의 초대가 되는 것이죠. 의식의 바탕은 기존에 있던 것을 가지고 인식합니다. 사고는 언제나 정보를 가지고 판단하죠. 그래서 기존 틀을 항상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틀을 기준으로 변화를 줄 것인지 아니면 유지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의식은 대게 후자의 것을 선택하고 사진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 틀 안에서 나타납니다. 의식적인 사진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진이 나올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종종 이론을 넘어서자고 이야기합니다. 이론에서 벗어난 사진을 찍자고 합니다. 이론은 정보입니다. 정보를 벗어날 수 있지만 의식을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죠.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면 새로운 사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론과 의식을 뛰어넘어 사고의 틀을 새롭게 바꾸지 않는다면 사진의 나타남도 바뀌지 않죠. 응시 이전의 이론, 이론 이전의 인식, 인식 이전의 의식, 의식 이전의 어떤 상태를 바꾸지 않는다면 대상의 새로운 형태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죠.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알에서 태어난 새끼는 자신에 빗대어 어미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최초로 경험한 대상을 보고 맹목적으로 의존하며 인식하기 시작하죠. 그렇다면 이미 깨어난 인식은 어떻게 다시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바라봄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전복된 시선이 아니고서 새로움은 불가능하죠.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새로움을 찾기 위해 기존 것을 희생시키는 것은 무모하죠. 이성복 선생님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구절입니다.
쉽사리 너 자신이 고통의 껍질을 벗겨 환희를 찾으려 들지 말 것. 기다릴 것. 조급하게 속단하지 말고 기다릴 것! p226
단지 기다리기만 할까요. 다른 구절입니다.
의문, 의문, 의문, … 끝없는 질문만이 ‘고향’으로 너를 조금씩 밀어가 줄 것이다. p61
시선을 전복시킬 수 없다면 의문만이 다시 태어난 곳인 고향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의문이죠. 시선의 전복은 한 번에 갈 수 없습니다. 의문을 동력 삼아 조금씩 밀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인간적인 것이죠.
우리는 처음 결혼식을 갖는 신랑처럼 어색하게, 어눌하게 살아간다. 그것이 생이라면, 구태여 세련된 것은 인간적이 아니다. p236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