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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귀자씨 Mar 26. 2022

개인적인 청와대 기억

군생활을 청와대 경비하는 부대에서 했다. 군생활 추억이 있다 보니 지금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이슈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정치적 찬반이 아니다. 그냥 단절에 관한 개인의 서운함이다.


가을에 휴가 나가는 걸 좋아했다. 경복궁 담벼락 따라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가 노란 잎 쏟아내면, 그걸 밟으며 걷는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이등병 시절 그곳에서 첫 외출했을 때 효자동 한 구멍가게 들어가 초코바부터 샀다. PX에서 볼 수 없는 수입 초코바 손에 쥐고 은행잎 밟으며 자유 만끽하던 21살 가을의 기억이 생생하다. 구멍가게는 지금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생활관 옥상 체력단련장에서는 경복궁 안쪽을 볼 수 있었다. 대단한 구경거리는 없었지만 옥상에서 경복궁 내부 관찰하다 보면 내가 특별해지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군인 신분 된 후 크게 낮아진 자존감이 조금은 살아나는 듯했던 그 옥상의 짠한 기억도 생생하다.


밤부터 아침으로 이어지는 근무를 서다 보면 같은 시간대에 산책하는 동네 주민을 종종 만났다. 매일 아침 커다란 강아지와 느릿느릿 걷던 하얀 수염 어르신을 보며 언젠가 이 근처에서 살고 싶단 생각을 했다. 2018년에 종로구민이 됐으니, 막연했던 바람 13년 만에 실천한 셈이다.


몇 해 전에는 군생활 함께 했던 연범 헌길 성직과 서촌에서 거하게 마신 뒤 라면 두 박스 사들고 부대를 향했다. 정문 보초 서던 일면식 없는 후임병이 “누구십니까” 하는데 “여기 전역자예요. 나눠 드세요” 하고선 라면 박스 놓고 도망친 기억이 난다. 그쪽엔 진상 취객 정도로 보였겠지만 우리끼린 꽤 행복했다.


대통령 경호처도 있고 101단 경찰도 있어 21세기엔 존재의 이유 자체가 모호했던 부대, 김신조의 흔적이었다. 어쨌든 지극히 개인적인 그 흔적이 청와대를 떠날 수도 있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적어놓지 않으면 영원히 상실할까 두려운 기분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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