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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Apr 24. 2022

그 시절, 나의 구원자

“저는 인간관계가 일회용 같아요”

내가 속한 극단에서 그 당시 내가 하는 생각을 꺼내 놓았다. 내가 사람을 사람 자체로 보지 않고 도구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또 사이가 좋았던 사람도 갈등이 한번 생기면 회복하기 쉽지 않아서 한 말이었다. 근데 말을 하고 나니 내가 너무 쓰레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말했나 싶었다. 그날 활동이 끝나고 소감을 나누는 시간에 나는 그때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제가 그 말을 해놓고 괜히 이야기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내가 너무 나쁜 사람 같다고. 그러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든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두서없이 내 감정을 털어놓는데, 연출님이 그러셨다. “왜 항상 해원은 선택지가 부정적인 것밖에 없어요? 이야기했으면 후련하다. 안 했으면 불편할 수 있는데 안 해서 다행이다. 그럴 수 있잖아요. 이야기를 하면 괜히 한 거 같고. 이야기를 안 하면 답답하고. 그런 게 아니라.” 머리가 띵해졌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항상 노답이었던 삶에서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한 번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래도 찝찝하고 저래도 찝찝한 것들뿐이었다. 삶이 우울하고 슬펐는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닳고 닳도록 들어왔지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몰랐다.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는 생각을 내 삶에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연출님은 이렇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혼자 빙글빙글 돌며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 있던 나에게 새로운 방향을 일깨워준 분이셨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또 있었다. “나의 약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세요.” 연출님이 주문했다. 각자 자신의 약점을 털어놓았다. 나는 유리턱 같은 멘탈을 이야기했다. 둘 씩 짝을 지우라고 했다. 둘 중 한 명의 약점을 장면으로 표현해보라고 하셨다. 상대 배우의 약점으로 표현을 했다. 상대배우의 약점은 ‘갑작스럽게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난감하다’였다. 우리는 이것을 여행 중의 상황으로 표현했다.


이태리 피렌체, 두오모 성당으로 향하는 길.

“해원아, 저기…”

“응? 왜?”

“나… 미안한데 지금 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괜찮을까?”

“지금??? 여기 너가 가자고 한 곳이잖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아 미안해. 근데 혼자 좀 있고 싶어서 그래…”

“갑자기 당황스럽네…”

“미안해..”

“아니야. 가야지. 가고 싶은데… 가…”

컷. 연출님이 끊었다. 사실 친구가 말을 꺼낸 순간 나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 이 친구는 보내줘야 했다. 친구를 잡고 있어 봤자, 불행한 사람을 억지로 잡고 있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혼자가 되면 나는 슬플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불행해질 결말이었다. 


연출님이 다른 답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둘 다 어리둥절이었다.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친구가 가고 싶다는데 내가 어떻게 억지로 끌고 갈 수가 있을까. 멍한 상태로 두 번째 씬이 시작됐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서브 텍스트를 말하세요.” 연출님이 말했다.

“근데 너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내가 버려진 기분이 들어. 낙동강 오리알이 된 거 같아. 너가 나를 엿 먹이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 걸 알아. 하지만… 내 기분은 그래… 너가 가야 되는 게 맞아…”

컷.


연출님이 ‘엿 먹이려’와 같은 욕이나 격한 표현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는 말이라고 조심하라고 하셨다. 그런 말은 빼고 다시 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원트를 말하라고 하셨다. 난 이미 하고 싶은 말은 최대한 표현했었다. 더 이상의 답은 보이지 않았다. 

“나 몇 시간만 혼자 있고 싶어”

“갑자기 너가 그러니까,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된 거 같아. 버려진 기분이 들어…”

“원트를 말하세요. 너가.”

“너가”

“가면”

“가면”

“나는”

“나는”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를 말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눈물이었다. 불안하다고 말을 한 순간 내 마음 속 무언가가 건드려진 느낌이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펑펑 났다. 연출님의 디렉션은 계속됐다. 


“가지마”

“가지마”


내가 원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을 옭아맨다는 생각에 하지 못한 말. 엉엉 울면서 그 말을 뱉어냈다. 내가 원하는 게 상대방을 강요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에게는 말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었다. 나의 격한 반응에 상대 배우가 오히려 당황했다.


“괜..괜찮아? 나.. 안 갈게. 안 가도 될 거 같아.”

“아니야. 가. 가도 돼. 내가 지금 우는 거 신경 쓰지 마. 나도 내가 왜 지금 이렇게 멍청하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너는 가는 게 맞아. 신경 쓰지 마 진짜.” 

“아니야.. 나 안 갈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우리는 성당에 가지 않았다.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연출님이 또 말했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인 너가 아이스크림 사.”

“…각자 내자”

“말하세요.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너가 아이스크림을 사.”

“어떻게 말해요… 이 친구 잘못도 아닌데…”

앉아있는 동료 배우들이 답답해하는 소리를 냈다.


“말해도 되는 일이에요. 말하세요.”

“이 친구도 힘든데…”

“왜 나를 거지로 만들어요~” 상대 배우가 말했다. 결국 각자 사는 걸로 하고 밥을 상대배우가 사면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연출님이 말했다. “상대방이 원트를 이야기할 때 내 원트와 다르다면, 이야기를 해야 해요. 상대가 말한 원트보다 내 원트가 강하다면 주장해야 해요. 그 안에서 조정을 하는 거죠. 내 머릿속에 답을 정해 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내 원트가 받아들여질 기회도 가져 볼 수 없어요.”


항상 누군가 원트를 말하면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 내 마음과 상관없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나의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고 바라는 바를 명확히 하는 것. 인생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순간에서 YES or NO 식의 이분법적 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답이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십여 년간 몰라 헤맸던 귀한 깨달음이었다. 연출님은 스스로 생각을 정해버리고 우울해했던 나의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끊어 주셨다. 그녀는 나의 구원자였다. 우울하고 답답한 인생 속에서 혼자 문제를 풀지 못해 자괴감이라는 수렁에서 허우적대던 나를 꺼내 준 그 시절 나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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