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드라마 인생, 인생 드라마

문화콘텐츠 기업 응원기

by 임요세프

다채널 시대다. 한때는 공중파 3사가 우리가 보고, 듣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아직도 그 시절 이야기하면 영락없는 꼰대다. 지금 방송국은 공룡 같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덩치는 큰데,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표현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K-POP, K-드라마의 열풍은 여전한데, 과연 그 인기가 대중성과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열광적인 팬덤(Fandom)을 보유한 아이돌, 배우, 셀럽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큰돈을 벌고 있는 건 알겠으나, 전 세대에 어필하는 작품인가는, 다른 차원이다.

BTS, 블랙핑크의 유명세야 다 아는 바이지만, 그들이 만든 음악이 대중성과 보편성을 가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대중문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대중의 취향도, 장르도, 채널도 다양해졌다. 지금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다.

당장 유튜브, 넷플릭스만 열어보아도 콘텐츠가 난무한다. 전 세계 1등 채널 안에서도 콘텐츠 간 경쟁이 이렇게 치열한데, 또 경쟁플랫폼은 얼마나 많은가.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대중문화는 공급자 위주의 시장이었는데, 지금은 소비자 우위의 대표적 산업이 되었으니, 소비자로선 환영할 만한 일이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수준 높은 콘텐츠가 실시간으로 제공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콘텐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고전(클래식)에 대한 기대감은 지울 수 없다.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고, 자극적 도파민을 분출시킨다고, 고전이 되는 건 아니다. 차라리, 강렬한 첫인상은 쉽게 질리고, 잊힐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 하는 일, 먹는 음식, 읽는 책, 듣는 음악, 보는 드라마(영화)가 바로 그 사람이다. 구구절절 자기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어떤 책, 음악, 드라마를 즐기는지만 알아도 그의 취향, 인생관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에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은 없다. 문학이나 클래식 음악, 연극 영화학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해도, 누구든 직관적으로 자신에게 딱 맞고, 감동을 주는 노래, 영화, 드라마를 만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구나 문화적 인간이다(Homo Culturalis).


다채널 시대, 인생 드라마를 찾는다고 해서, 얼마만큼 타인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60억 인구마다, 각자의 인생을 관통하는 역사와 수많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태어나 죽는다는 명제를 빼고는, 우리 인생은 보편성보다는 특수성, 의외성, 일회성 사건들의 연속이다.

애당초 모두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인생 드라마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모든 이에겐 그저 자신만의 인생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콘텐츠의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다.



오늘 만난 C 대표는 드라마 제작사를 운영한다.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 취업해 10년 가까이 다녔다. 명색이 매니지먼트사 대표 정도면, 신문방송학을 전공해 방송국/광고회사 PD가 되거나, 문학을 공부한 후 작가 혹은 연출부로 경력을 쌓거나, 그것도 아니면 연예 매니지먼트사에 입사해 배우 매니저라도 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을 법한데, 고작(?) 대기업 사무직이라니!


역시, 인생은 각본 없는 드라마인가 보다.


C는 우연한 기회에 지인과 함께 광고, 홍보영상 제작업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을 설립했다. 그의 나이 30대 후반의 일이다. 생뚱맞은 도전이지만, 광고 분야 전문가와 함께였고, 한편으로는 뻔하고 뻔한 대기업 직장인의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심도 컸기에, 창업이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였을 터다.

10년 이상의 대기업 경력, 영업과 마케팅에 대한 자신감, 넓은 인적 네트워크, 거기에 광고 분야 경력직들의 합류까지 있었으니, C가 실패를 염두에 둘 일은 없었다.


그러나, 법인설립 후 3년 동안 실적이라곤, 무명 가수의 뮤직비디오 한두 편 제작, 중소기업의 홍보 동영상 촬영이 전부였다. 결국, 3년 만에 법인은 청산하고, 직원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졌다. 다행이라면, 청산 못할 빚이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C는 대기업 사무직 때보단, 훨씬 생동감 있는 인생을 살게 되어 다행이란다. 사업 실패치고는, 채무상환 부담감이 없다는 점도, 해당 업계에서 계속 승부를 보아야겠다는 의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그리고, 감당 못할 빚을 떠안지 않을 통제력이다.


C는 이후 드라마, 영화 등 영상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문화콘텐츠 기업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그곳에서 10년을 보내니, 업계 전반에 관한 시야가 트였다.


세상에 드라마나 영화로 내보일 만한 소설, 웹툰, 이야깃거리를 찾고, 원작자와 협상해 저작권을 사들이고, 각본을 각색할 작가를 발굴하고, 배우와 연출자를 섭외하고, 방송사/영화 배급사/OTT 플랫폼 회사를 찾아다니며 제작 편성을 요청했다.

성공 방정식 따위는 없었다. 빠듯한 예산에도 상사와 주주들을 설득해 수천만 원, 수억 원을 주고 호기롭게 사들인 원작에 대한 반응부터 제각각이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보는 눈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작품의 성공과 실패를 예단하기 어려웠다. 설은 하나여도, 이를 어떻게 촬영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느냐에 따라, 로맨틱 코미디가 되기도, 미스터리 스릴러가 되기도 한다.



원작, 연출, 촬영, 배우, 스태프, OST, 코로나, 주가지수, 경제성장률, 날씨, 전쟁.


드라마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중 일부다. 공통된 기준은 없다. 저마다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성공의 요소, 실패의 원인이 달랐다. 내가 생각한 장점이, 누군가에게는 확고한 단점이기도 하다. 결국, 어떤 작품이 선택받을지, 흥행에 성공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성공이 운이라는 뜻은 아니다. 대충 만들어 놓고, 넷플릭스나 KBS에 찾아가 이 작품 사달라고, 방영해 달라고 조른다면, 그건 망하는 지름길이다. 변덕스러운 대중의 반응은 일일이 통제할 수 없을지언정, 한 작품 한 작품 모두 나름의 최선을 다해 완성해야 한다. 중간중간 이해관계자들의 피드백을 반영해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건 불가피하다.

규격화된 제품이나 상품, 서비스와는 달리, 문화콘텐츠는 살아 있는 생물과 같다. 변화무쌍하고,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C의 경험에 따르면, 첫 기획 단계의 시놉시스가 끝까지 유지된 경우는 한 차례도 없었다. 하기야, 박찬호 봉준호 정도 되는 명장이 메가폰을 잡고 끝까지 본인 생각대로 밀어붙이지 않는 한, 어떤 작품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더구나, C의 일터는 우리가 들으면 아무도 모를 작은 기업 아니던가.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양보와 타협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대기업이 아닌 이상, 공급자의 협상력을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중소형 콘텐츠 제작사는 작가, 감독, 배우, 촬영 스튜디오, 방송사(플랫폼), 관객(시청자)의 눈치까지 살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 드라마 한 편이 온전히 완성돼 이 세상의 빛을 보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만하다. 최종 소비자(시청자)의 사랑을 받느냐, 아니냐는 둘째 문제다. 개발 중인 20여 편의 라인-업 중 한두 편이라도 방영되면 대성공이다.

넷플릭스, 티빙, 쿠팡플레이, 웨이브, 디즈니 플러스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OTT 플랫폼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하다. 경쟁이라지만, 넷플릭스를 제외하면, 사실상 치킨게임이나 다름없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플랫폼 사업자의 내일도 장담하기 어려운데, 그 많은 플랫폼 안에 작품 하나 판매하기 위해 최소 수개월, 최대 몇 년은 영혼을 갈아 넣고, 대답 없는 메아리를 외쳐야 하는 콘텐츠 제작기업의 고충은,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는 몇 해 전 다시 법인을 설립했다. 이번엔, 방송국 드라마 제작 경험이 있는 젊은 PD들과 함께다. 다행히, 이들의 경험과 경력, 보유 포트폴리오의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전략적 투자자들로부터 초기 투자금도 유치했다. 단기간 내 승부를 보기는 어려운 분야이니, 길게 호흡하기로 다짐했다.


꿈과 현실 사이 간극은 여전하다. 사업 초창기, 시나리오, 연출, 작가, 배우 섭외까지 마무리된 작품 하나가, OTT 회사와 잘 이야기되던 중 최종 계약 단계에서 무산됐다. 대표 본인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상처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시간, 열정, 투자금(저작권료, 작가료, 감독/촬영 스태프 계약금 등)도 되돌려 받을 길은 없다.

그러나, 업계 특성을 고려하면,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뒤라도, 선택받기 위한 기다림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계약의 상대방이 있는 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후회는 없다. 작품의 흔적과 경험도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그저 때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처음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첫 2년간은 연간 매출액이 수천만 원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공중파 인기 드라마 제작 PD 출신들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회사인데, 고작(?) 유튜버 홍보영상 촬영이라니!


그때는 자존심 상했으나, 이제 와 돌이켜보니, 얼마나 소중한 고객인지 모른다. 열과 성을 다한 노력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실력이 소문이 난 것인지, 원작(시나리오)이 뛰어났던지, 그것도 아니면, 시절과 운을 잘 탄 것었던지 에 결국 C는 작년 한 해만 총 2편의 드라마를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한 작품당 납품 가격은 수십억 원에 이른다. 끝까지 버티고 볼 일이다.

물론, 업종 특성상 매출(제조) 원가 비중이 높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회사 밖으로 지출할 비용을 최소화하고, 내부 유보금과 수익률을 높이는 게 최선일 터다. 하지만, 상부상조해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게 이 업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주와 직원들에게 이해를 구한 C는 욕심부리지 않고, 기꺼이 협력자들과 수익을 나누었다.


완성작이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회사 임직원은 생계를 유지하고, 다음 작품을 준비할 여유도 비축하게 된다. 회사 밖 촬영 스태프, 작가, 감독, 수많은 무명 배우에게도 큰 도움이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작품 한 편의 론칭은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인생에 영향을 준다.


잘만 되면 K-콘텐츠는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고,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데도 크게 기여한다. 사명감과 자부심이야말로, C를 위시한 문화산업 종사자들이 이 업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넷플릭스에 대한 세평은 다양하다. 글로벌 기업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는 별개로, OTT 기업의 문화콘텐츠 최종 생산자로서 역할은 인정해야 한다.


내 맘에는 안 들지언정, 한 편의 드라마가 누군가의 인생을 뒤바꿀 수도 있는 일이다. 이에, 나는 매월 만 원의 구독료를 기꺼이 내는 것으로 문화소비자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하기로 한다.


C를 응원하다 보면, <미생>, <나의 아저씨>, <비밀의 숲>을 능가하는 인생 드라마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콘텐츠 제작자들의 인생도 해피 엔딩이면 좋겠다. 이제, 주말 밤은 편한 마음으로 콘텐츠 바닷속 보물을 찾는 시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퇴사의 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