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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요세프 Dec 16. 2023

오늘도 난(1996)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

1996년 대학에 입학했다. 생애 첫 번째 독립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 이때부터 쭉 부모님과는 떨어져 살고 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의 울타리 안에 살았던 시간이 채 스무 해도 안 되었던 셈이다. 지금이야 누군가의 아들보다는, 아버지, 남편, 그리고 회사 직책이 더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부모님 없는 나 홀로 서울 생활곤욕이었다. 오롯이 나의 의지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존의 위협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무슨 일이든 그저 다 <그냥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친구들보다 조금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중고등학교 학비를 내주었고, 이름 모를 동문 선배가 대학 등록금까지 기꺼이 쾌척해 주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먼저 움직이지 않아도,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알아서 움직이는 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생존이 지상 과제임을 깨닫기까지는 채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해결된 거라곤 한 학기 등록금, 그리고 반년 치의 기숙사비가 다였음을 알아버리고야 만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고야 변화와 혁신이 필수과제임을 깨닫게 다.   

  

그렇다고, 사립대의 학비 부담감을 낮추겠다며 국립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 종합반에 등록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기회비용이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 나의 실력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자기 주도 학습은 해본 적 없었고, 읽은 책도 많지 않았으며, 답안지를 보아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수학의 정석' 속 문제 너무 많았다. 꿈을 꾸기에 앞서 생생한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행정고시니, CPA니, 한국은행이니 하면서 공부에 진심인 동기들을 보고 있자니, 성적 장학금도 언감생심이었다. 부모님이 간간이 보내주시던 용돈마저 끊기니, 당장 점심 한 끼 해결할 밥값도 부족했다. 명문대생의 알량한 프라이드속절없이 졌다.    

  

나에게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지체 없이 인근 중고등학교에 과외 전단지를 뿌리고, 보습학원 강사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학과 사무실에 매일 같이 출근해서 행정 보조와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수소문했다. 성적 장학금 말고도 대기업 장학재단에서 출연한 장학금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업별 맞춤형 소개서를 수시로 업데이트해 제출했다. 제대 후에는 틈나는 대로 각종 공모전에 응모다.   

   

그렇게 대학 4년을 보내는 동안 과외, 학원 강사,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계속했다. 고등학교 동창 녀석들 만나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정도는  수 있을 정도의 주머니 사정 유지됐다. 동부문화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간 등록금 면제에 매 학기 장학금까지 플러스알파로 받으면서 다녔다. 매일경제신문에서 주관하는 대학생 경제 논문 대회에서 우수상 받아 하마터면(?) 기자로 입사할 뻔한 기회도 얻었다.

     

<그냥 그렇게> 이루어지는 일은 없음을 깨닫고, 부질없는 자존 내려고,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움직이니, 결과들이 따라왔다. 학비와 책값 걱정 없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다양한 경험들은 이력서에 차곡차곡 쌓여 여러 대기업, 금융기관 합격으로 이어졌다. 마음먹기, 행동하기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궁(窮)하면 통(通)한다는 말은 참이었다.    

 



이승철은 1996년 <오늘도 난>을 발표했다. 학교 기숙사 휴게실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의 오래된 팬으로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엔 적잖이 실망했다. 공중파 가요순위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TV를 보다가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컵라면을 먹다가 그의 춤사위(!)에 깜짝 놀라 사례 걸린 동기가 있을 정도였다.   


댄스인지 뽕짝인지 알 수 없는 리듬,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춤, 부정확한 발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노랫말에 이르기까지, 그에게서 예상했던 모습은 단 하나도 찾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복귀하는 이승철의 변신이라는 멘트가 있었지만, 이런 파괴적 혁신(Destructive Innovation)까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도 난>을 발표하기 전, 그는 팝의 본고장인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으로 건너가 4집 앨범 [Secret of Color: 색깔 속의 비밀]을 제작했다. 팝스타 '스팅'의 프로듀서, 아카펠라 그룹 '뉴욕 보이시스' 등과 함께 작업하며 가스펠성 아카펠라(겨울 그림), 재즈(색깔 속의 비밀) 등 미국 스타일의 앨범을 완성했다.


가수 생활을 하면서 번 돈을 다 투자했다고 인터뷰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이 앨범은 3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음악적 완성도가 높다. 그의 보컬은 노래마다 변화무쌍하고, 유려다.   

  

그러나, 이승철 4집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비평가들로부터 음악적 완성도에 대해 칭찬받고, 나를 비롯한 그의 정통 팬들로부터 역작(力作)이라는 찬양 받았을지언정, 정작 일반 대중은 그가 <색깔 속에 담은 비밀>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본인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고, 만족했으면 그것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일 수는 있다. 그리고, 이 앨범이 언젠가 재평가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통 팬들의 지지와 평단의 찬사까지 받았으니, 실패라고 단정 짓는 것 역시 무리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사는 대중가수로 스스로를 규정했다. 자기만족, 혹은 소수 마니아를 위한 음악만 만들어서는 생명력이 지속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음악(音樂)은 음학(音學)이 아님을 말이다. 가수 데뷔 10년 만에, 천하의 이승철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의 필요성을 몸소 깨달은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남성 보컬리스트라는 과도한 자신감, 록그룹 보컬리스트 출신이라는 자심을 내려놓은 그의 선택이 바로 <오늘도 난>이었다.

      



국가나 기업 차원에서 변화와 혁신은 거창한 주제(테마)겠지만, 사실 개인 차원의 변혁(變革)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는 일이 팔 할 이상이다.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안다. 해보지 않은 일, 익숙하지 않은 일에 도전하면 되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는 둘째 문제다. 

 

<오늘도 난>은 윤일상이 작곡했다. 지금이야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1996년 윤일상은 20대 초반의 신인에 불과했다. 신인 작곡가의 프로듀싱 하에 난생처음 전통가요 느낌이 나는 곡을 부르고, 흑인 댄서들과 합(율동)을 맞추고, 가사를 음미하기는커녕 일부러 발음을 뭉개어 끈적끈적 노래하자, 번에는 대중이 환호했다.


한편에서는 배신자, 기회주의자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욕도 많이 먹었다. 스스로 밝힌 바처럼, 그는 <오늘도 난>으로 마니아를 잃고, 대중을 얻었다. 가요 순위프로그램에서 생애 첫 1등도 경험했다. 가창 을 과시던 과거의 히트곡으로는 이루지 못했던 성과였다.  

    

나 노래 잘하지? 가사 멋지지? 연주 예술이지? 같은 뽐내기를 멈추고, 노래방에서 흥겹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音樂)을 만들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의 노래를 즐기게 된 것이다. 뮤즈(Muse) 이승철에서 대중가수 이승철로의 완벽한 변신다.   

   

물론, 맞고 틀리고는 없다. 누군가는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을 선택할 것이다. 선택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이승철은 시류(時流)에 부합(符合)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대중가수가 되리라 마음먹은 후, 기회추구 행동을 지속했을 뿐이다.


그가 데뷔 40년을 목전에 두고도 현재진행형 가수로 활동할 수 있게 된 시작점이 <오늘도 난>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테다.    


그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사, 작곡, 편곡, 악기연주까지 홀로 도맡아 처리하는, 고뇌하는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걷기보다는, 폭넓은 세대와 소통하면서 가장 재능 있는 노래(가창)에 집중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는 전천후 음학(音學)인이 되어 평론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기보다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 사랑받는 대중가요(大衆歌謠)를 부르고, 그의 곁을 떠난 노래가 세상에 널리 불리는 것이 더욱 가치 있다고 판단.  

   

스스로 선택한 변화와 혁신을 통해 승철은 위기(危機)를 기회(機會)로 바꾸었다.    

  



일찍이 플라톤은 짜임새 있는 배열과 올바름을 '탁월함'이라고 기술하면서 타고난 재능을 우선시했다. 선천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보다 앞서 나가는 것 당연플라톤의 논리 반 시민을 좌절케 했다. 고대 그리스 사회도 비교와 경쟁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순수 사유에 의한 직관이 뛰어난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보컬리스트 이승철도 축복받은 운명자 중 한 명인 게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선천적인 능력을 타고났어도 이른 나이에 고꾸라지거나, 미처 재능을 꽃피우기 전에 저물어버린 들을 숱하게 보아 왔다. 젊은의 이승철도 영욕(榮辱)의 교차기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탁월함은 교만과 방심을 동반하기에,  한계 또한 분명하다. 


반면, 플라톤의 제자인 메논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올바른 마음가짐과 꾸준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또한, 탁월함은 후천적으로도 수학(修學: 가르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타고난 달란트, 지나온 인생,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기대 이상의 결과는 탁월함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재능이 무언지 평생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꾸준한 노력뿐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복기하고,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변화꾀하는 수밖에 없다.


올바른 마음가짐을 안착시키는데 선천적인 능력의 부족은 오히려 축복다. 이승철도 신이 내려준 재능에 대한 과신을 내려놓은 후에야 비로소 <신의 질투>를 피해 갈 수 있었다.

    

스무 살 시절, 방구석에 누워 신세 한탄하며 허송세월 보내는 대신, 꾸준한 도전으로 자칫 무너질 뻔했던 인생에 나름 혁신성과를 창출했던 기억이 나는 요즘이다. <오늘도 난> 그 시절의 나를 소환해 조금 더 나아질 미래를 설계해 본다.  

    

1%의 영감이 부족해 영원히 천재 소리는 못 들을지언정, 직장의 삶을 지속하면서도, 계속해서 읽고 쓰다 보면 200페이지 분량의 <Never ending story> 책 한 권 정도는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안다. 1996년의 나와 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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