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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요세프 Dec 18. 2023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2009)

종교와 정파를 넘어

나와 종교와의 <인연>은 중학교 때 시작됐다. 교회 재단에서 설립한 미션스쿨을 다녔다. 스스로 원했던 건 아니다. 일명 뺑뺑이 돌려서 나오는 대로 진학하는 거였는데, 하필 집에서 가장 먼 기독교 학교에 배정됐다.


매주 1회씩 성경 수업을 받았다. 강당에서 모일 때마다 교회 장로이기도 한 선생님들의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불렀다. 학생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헌법에도 보장된 종교의 자유가 박탈된 셈이다.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까까머리 중학생들은 기꺼이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며 3년을 보냈다. 주일 예배에 나가지 않아도 죄짓는 기분이 들지 않는 건 덤이었다.  

    

누구 하나 수업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던 걸 보면, 90년대 초반까지 이어군사정권의 몰(沒) 개성주의, 획일주의, 집단주의 문화가 부지불식간 소년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영화 속에만 존재했다.


감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성경 말씀에 토를 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주입식 교육이 신실한 기독교인 양성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력을 미쳤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불교와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머니는 신실한 불교 신자였다. 법당에 손주들의 이름을 올려 두고, 우리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비셨다. 모르긴 해도, 큰 손자인 나의 절 등값은 동생들에 비해 몇 곱절더 비쌌을 다. 그 무렵 나는 할머니의 소개로 어느 승려(비구니)를 알게 됐고, 충청도의 이름 모를 절에 들어가 6개월을 보냈다.


덧없는 속세를 저버리겠다며 느닷없이 불교로의 귀의를 결심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의 기대를 못 이기는 척, 행정고시에 도전해 보겠다는 호기로움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6개월짜리 템플 스테이(Temple Stay),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야심경은 머리에 남지 않았지만, 한동안 나를 괴롭히던 두통이 말끔하게 나았으니, 소득이 없었던 아니다. 행정고시를 왜 고등(高等) 고시라고 하는지, 왜 과거급제(科擧及第)라고 부르는지 알게 된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고위) 공무원, 종교인은 나 같은 범인이 감히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점도 명확해졌다.




사실, 천주교와의 <인연>이 가장 깊다. 모태신앙인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성당에 다녔고, 세례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결혼식도 성당에서 올렸다. 나의 필명인 ‘요세프’의 어원도 실은 세례명 요셉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 요셉 맞다.


어쩌면, 내 삶이 버겁다고 느껴지는 데는 세례명도 일정 지분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름의 무게감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속세의 죄는 덜 짓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걸 보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책을 꼽으라면, 선뜻 <성경>이라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다툼이 한창인 지금은 오히려 종교에 대해 더 회의적이다. 기약 없는 냉담자라고나 할까. 고백하자면, 지금의 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영향력 아래 사는 중이다.  

  

이것도 현재의 생각이지, 영원한 신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종교와 현실 사이 수많은 모순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고 있고, 우리는 모두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끌어안고 살며, 결국엔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금세 타버리는 심지를 가진,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바뀌는 미약한 미물(微物)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 이승철은 불자(佛子)였다. 보시(報施), 즉 세상에 베푸는 마음으로 노래한다고 인터뷰할 정도로 그는 이름난 불교 신자였다. 그랬던 그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나서는 한동안 성당에 다니다가, 지금은 개신교로 개종했다. 2013년 발표한 <MY LOVE> 앨범에 CCM 곡(소원)까지 실은 걸 보면, 이제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교회 오빠 이승철은 유독 선한 영향력을 중시한다. 그는 콘서트 수익금 중 상당액을 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아프리카 차드에 우물 파기, 학교 짓기 사업에 쾌척했다. 단발성 프로젝트에 그친 것도 아니다. 직접 현지 봉사도 가고, 아픈 아이들을 우리나라에 초대해 병원 치료까지 후원한 걸 보면,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가 탈북 청소년들과 독도에서, 그리고 UN 본회의장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며 <그날에>를 목청 높여 부르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는, 이기적 냉담자로 살아가는 나를 반성하기도 다. 교인, 불자,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어려운 이웃 돕는 이를 욕할 자는 없다. 전도(傳道者)에는 설교보다 실천이 최고다.


1985년, 이승철 데뷔 당시 이미 팝의 황제였던 마이클 잭슨은 <We are the World>를 발표했다. 대기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돕자는 취지에서 만든 곡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스티비 원더, 티나 터너, 레이 찰스, 빌리 조엘, 브루스 스프링스턴, 밥 딜런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참여했다. 취지도 지만, 아무래도 마이클 잭슨 이름값이 컸으리라. 앨범은 무려 2,000만 장이나 팔렸고, 그는 앨범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다.


1992년, 마이클 잭슨은 <We are the World>의 솔로 버전 격이라 할 수 있는 <Heal the World>를 발표했다. 이 곡은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 반전(反戰)과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하는 이 노래도 크게 성공했고, 그의 선한 영향력은 정점을 찍었다.


이런 실행력이야말로 (성서) 활자 밖으로 뛰쳐나와 살아 움직이는 기독교(청교도) 정신 아닐까 싶다.    


물론, 선의가 늘 성과를 보증하는 건 아니다. 마이클 잭슨도 <Heal the World> 발표 이후 본인 의도와는 달리, 숱한 추문으로 죽을 때까지 마음고생했으니, 일의 결과는 어쩌면 하늘의 몫인지도 모른다.  

   



1997년, 이승철은 IMF 국난 극복을 위해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참여한 프로젝트 송 <하나 되어>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2015년에는 광복 70주년 기념 통일 희망곡 <우리 만나는 날>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인순이, 조영남, 김범수, 김태우, 씨스타, 유희열 등 30여 명의 국내 정상급 음악인들이 참여해 곡의 취지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곡의 파급력이나 영향력을 놓고 보면, 2009년 발표한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능가할 만한 노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원래 이 노래는 권상우와 이보영이 주연한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의 주제가(OST)로 세상 빛을 보았다. 이승철 본인이 영화 속 가수로 직접 (특별)출연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으나,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의 곳에서 노래가 울려 퍼졌다. 2009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곡으로 쓰이면서부터다. 이 노래가 유튜브와 각종 SNS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 추모 영상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자연스럽게 퍼져나간 것이다.


2018년, 봉하마을에서 엄수된 서거 9주기 추도식에 그가 직접 참여해 공연까지 했으니, 자칫 이 노래는 노무현(진보 진영)만을 위한 노래로 소비될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를 따로 지칭하지 않았던 이 곡의 노랫말은 진영(陣營)이나 정파(政派) 따위를 뛰어넘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생 그리워하고, 참 고마운 사람 한 명 정도는 가슴에 품고 살기 때문이다.


2021년, 대선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도 이 노래를 불렀다. 보수진영 대표임에도 거리낌 없이 목청껏 열창했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메시지를 남기면서까지 말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대통령 후보가, 편한 옷차림으로 노래방 기계에 맞추어 목놓외침으로써, 혹여 이 노래가 한쪽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질 가능성을 차단해 버린 셈이다.  

    



노래종교와 정파를 초월(超越)한다. 직설적인 가사와 메시지로 우리 편을 하나로 규합할 수는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반쪽짜리다.


찬송가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노래하면, 종교적 저항이 덜할 것이다. 어린이를 돕고, 전쟁으로 병든 세상을 치유하자는 내용의 팝송을 반대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감히 판단컨대,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종교관보다 강하지는 않을 터다. 군사정권 내지는 인권이 유린된 독재 정부가 아니고서는 말이다. 사는 동안 절대불변일 것 같은 종교도 심심찮게 바뀐다.


공산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극단주의가 설 여지는 없다. 호기심에 사상의 변이가 종종 출현하더라도, 이내 사라지게 마련이다. 누가 뭐래도, 이 땅에는 집단지성과 상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비호감 대결, 최악 대 차악, 정치는 4류 따위의 구태의연함, 나는 정의 너는 불의라는 몰상식적 이분법이 사라지길 바라지만, 아직 요원한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가치관, 이념과는 한발 치 떨어진 보편성이 더 그리워진다.


사랑, 이별, 기쁨, 슬픔을 노래하는 통속가요가 계속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수준 낮은 유행가라고 폄훼하다간 큰코다친다. 대통령이 되려는 자,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불러야 하는 시대다.

     

단, 우리가 듣고 싶은 건, 노래 부르는 이 혼자 취해 고음만 뽐내는 엘리트의 노래자랑이 아니다. '천 번이고 다시 태어난대도 나의 심장쯤이야 얼마든 내어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이라는 노랫말에 오롯이 집중하는 가수의 절창(絶唱), 그리고 진정성이다.


어쩌면, 이 노래는 종교와 정파에 한계를 두지 않고 살아가는 그에게 주어진 <운명> 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값, 선한 영향력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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