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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요세프 Dec 24. 2023

마지막 콘서트 (1990)

고통과 권태 사이

나이 마흔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자기 계발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는 했지만, 사실 직장 생활의 안정성에 무료함을 느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솔직하겠다. 십여 년의 회사 생활 중 처음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니, 무엇이든 색다른 변화가 필요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빵집 창업이었다. 파리 바게뜨 사장님이 되는 건 나의 오래된 꿈이기도 했다. 삼촌이 고향에서 프랜차이즈 매장을 안정적으로 운영 중이기도 했으니, 잘 보고 배운다면 못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협 하나로마트 내 한 장소에서만 벌써 십 년 째고, 매번 힘들다고 투정하면서도 자녀들 대학 교육까지 뒷바라지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삼촌도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마흔 무렵 창업했으니, 왠지 이거다 싶었다.    

  

그런데, 창업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가뜩이나 아내의 동의를 구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빵 가게 차리겠다며 사표 내고 은행 대출까지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플랜 A는 자연스럽게 선택지에서 제외됐다.

    

두 번째는 법학전문대학원, 즉 로스쿨 진학이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야 최선의 선택지임이 분명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전문직의 상징인 변호사로 변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몇몇 지방소재 로스쿨 입학처에 문의해 보니, 그렇게 늦은 시작도 아니었다. 퇴직금으로 3년 동안의 학자금과 생활비 정도는 충분히 충당할 수 있을 듯했다. 이번 계획은 아내의 허락도 받았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바로, 노량진 LEET(법학적성시험) 학원 주말반에 등록했다.      


그런데, 이번엔 내 실력이 문제였다. 장시간 공부해도 점수가 오르지 않았다. 꾸준히 읽고, 외워서 공부한 내용을 풀어낼 수 있는 시험이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법학적성시험은 예전부터 나를 곤란에 빠트렸던 IQ 테스트,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과 비슷했다. 첫 모의고사 점수와 마지막 모의고사 점수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로스쿨 무용론, 사법시험 부활론을 나 홀로 부르짖으며(대답 없는 메아리), 결국 노량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가 박사학위 취득이었다. 금융연수원 출강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혹시 대학원에 진학할 거라면, 마흔 전에는 입학하라는 충고였다. 사십 대 이후에는 아무래도 지식 흡수력, 정보통신기기 활용 능력이 떨어지니, 조금이라도 이른 나이에 입학해야 끝(학위 취득)을 볼 수 있다는 조언이었다. 그분도 나이 마흔에 박사과정에 진학해 직장 생활과 학업을 병행했고, 학위 취득 후에도 꾸준히 논문을 써 결국 대학교수가 되었다.  


교수까지는 몰라도, 박사학위는 해볼 만한 도전라는 생각이 들었다. 4년, 5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꿈같았다. 실무경험과 이론적 배경을 겸비한 연구자가 되는 것, 교단에 서서 강의(講義)하는 것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러나, 호기로운 다짐과는 달리, 학위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기왕 하는 거면, 제대로 공부해서 학위를 받겠다는 다짐으로 국립대에 진학했는데, 교수님들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해 신규 임용된 교수님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는데, 그것도 알게 모르게 고역이었다.  

    

영어 논문을 읽고 분석하는 것, 수백 페이지짜리 이론서를 정독한 후 나의 언어로 해석하고 발표하는 것은 그런대로 할만했다. 창의성은 떨어져도, 성실성과 책임감만큼은 남들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4학기 동안의 커리큘럼(교육과정)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나이 든 아저씨가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휴학 한번 안 하걸 보고, 동기인 동생들이 신기하다 한 마디씩 거들기도 했다.   

   

실은 마음을 많이 다쳤다. 지도교수님은 수업내용을 정리하발표하는 나를 향해 칭찬하다가도, 내가 엉뚱한 소리를 한마디 하거나, 통계를 돌리다가 어리바리 헤매기라도 하면, 공개적으로 나를 깎아내렸다. 마흔 넘어 나보다 연배가 어린 교수에게 고문관 소리를 듣는 건 매우 힘겨운 일이다.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넘어갔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상아탑의 고질병인 갑질에 다름 아니다.   

  

고통의 하이라이트는 교수님의 논문지도였다. 중간중간 논문을 정리해서 교수님께 지도받았는데, 열 번 찾아가면 스무 번은 혼났다. 글의 흐름이 주제와 무관하다고 한 번, 공부가 덜 되었다고 한 번, 그렇게 두 번씩은 질책받았다.


칭찬받거나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정작 10대, 20대 학창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빨간펜 교습을 불혹(不惑)의 나이에 계속 으려니, 모욕감에 흔들리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그러나, 고통이 나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내가 이론적으로는 한참 모자란 생임이 분명했고, 논문 쓰는 요령, 통계분석 능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어쭙잖게 뭘 좀 아는 척하는 나에게, 어쩌면 3년이라는 수련 시간은 너무 짧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취득한 박사(博士) 학위는 학문적 성과에 대한 인정이라기보단, 혼나고 또 혼나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수정, 보완해서 제시간에 연구실 찾아오는 성실성, 꺾이지 않는 의지를 인정받은 결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여하튼, 나는 고통 속에서도 의욕을 잃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적잖은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일찍이 쇼펜하우어는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고통이 곧 삶에의 의지라고 표현하며, 사람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한 고통을 느낀다고 보았다. 따라서, 결핍과 부족함은 고통의 원인임과 동시에 모든 의욕의 기초이기도 하다.


결국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 것이다.   

   

나의 대학원 생활도 그러했다. 직장 생활의 무료함,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학했는데, 이는 나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기도 했다. 무료함, 안전감이 권태로 이어졌고, 권태는 새로운 의욕으로, 의욕은 고통으로, 고통은 마침내 성취로 이어졌다.  

    



1988년 1집 앨범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로 솔로 데뷔한 이승철은 이듬해인 1989년 12월 PART 2 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곡은 <마지막 콘서트>다. ‘밖으로 나가버리고~’ 부분의 긴 호흡으로 유명한, 지금까지도 종종 불리는 그 곡이다. 이 곡이 공전(空前)의 히트를 기록함에 따라 그는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다.  

   

그런데, 사실 이 노래는 1987년 부활의 2집에 <회상 3>라는 곡명으로 이미 발표된 곡이다. 작사와 작곡은 물론, 노래도 대부분 김태원이 불렀다. 김태원이 지금의 아내를 생각하며 쓴 곡이라고 하니, 어찌 보면 그의 자아(Ego)가 투영된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두운 분위기의 곡이었기에 아무래도 대중적인 인기는 한계가 있었다.   

  

3년 동안 둘의 인생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부활의 해체, 이승철의 솔로 독립, 그리고 실수로 인한 <방황>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20대 초중반의 사내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기였으리라.


둘은 서로를 향해 자신의 부족함, 결핍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팀의 리더를 향한 이승철의 좌절감과 궁핍감, 유독 보컬리스트에게쏠리는 대중의 관심으로 인한 김태원의 질투심은 어쩔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포문은 이승철이 열었다. 노래의 제목까지 <마지막 콘서트>로 바꾸고, 특유의 애절한 감성으로 노래 부르니, 전혀 다른 곡이 되어 대중에게 어필했다. 노랫말처럼 '노래가 끝이 나면, 많은 사람의 환호'가 이어졌고, 어느덧 그는 독보적 남성 솔로 보컬리스트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결핍이 고통과 욕망을 넘어 성취로 이어진 셈이다.

     

이제, 결핍은 김태원의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작권 수입에 오롯이 만족할 수 있었으려나. 하지만, 그는 '돈보다는 가오(폼)'가  우선인 로커 아니겠는가. 본인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작품(Originality)이, 어느 날 갑자기 TV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걸 듣고서는(그것도 제목이 바뀐 채), 좌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어찌 <부활> 일 수 있으랴. 그룹의 해체, 솔로 보컬리스트의 성공으로 심한 우울감에 시달리던 그는 한때 음악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마지막 콘서트>로 인한 상처와 결핍감은 그의 욕망을 자극했고, 이는 3년 <사랑할수록>라는 불후의 명곡으로 이어졌다.

      

결국, 결핍이 성취를 낳은 것이다. <사랑할수록>이 수록된 부활 3집 <기억상실>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앨범, 이 노래를 부른 故 김재기는 역대 부활 보컬리스트 중 최고의 발견이라 평가받을 정도이니, 전화위복 셈이다.    

 



어느덧, 김태원과 이승철 모두 50대 후반이다. 데뷔 4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동안 그들은 성취에, 성취에, 성취를  이제는 거장(巨匠) 소리도 듣는다.


그러나, 만족감은 필연적으로 권태로움을 낳는다. 매월 저작권 수입이 억대에 이르는 작곡가, 수백억 대 자산을 축적한 신랑학교 교장 선생님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성취감에 계속 젖어 있을 리 만무하다. 성취와 성취 사이 숱한 좌절감을 맛보았을 것임에도 말이다. 술가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삶의 의지를 갖기 마련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없는 목마름과 같다. 이제 두 사람의 시계추는 권태에서 고통의 방향으로 향할 차례다. 예순을 앞둔 그들이기에 예전과 같은 인기와 성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원하는 건 높이가 아닌 깊이다.  

    

시간은 분히 무르익었다. 그들이 함께 여는 <콘서트>를 기대해 본다. 마지막이라는 단어 거슬리니, 공연의 이름은 다음 차례 기약할 수 있는 <회상 4> 정도가 적당할 듯하다.

     

고통과 권태의 반복은 <아름다운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변덕스러운 욕망이 있는 한, 인생은 결핍과 만족의 무한 반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행복을 추구하려는 자, 욕망에 충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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