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불장이 다시 시작됐다. 최근 1년간 1bit 거래 가격은 2천만 원대에서 1억 원까지 치솟았다. 거의 4배가 오른 것이다. 다만, 이 시간 이후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쉽사리 예측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추가 상승에, 또 누군가는 하락에 베팅할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선에서 거래가 일어나는 제로-섬 게임이기에 웃는 자와 우는 자가 나뉠 것이다.
어떤 계기든 간에 최근 들어 비트코인에 관심을 가지고 거래를 한 사람이라면, 이익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오랜 시간 박스권에 갇혀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번 맛들이면 코인 수익률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만약 지금까지 노동의 대가로 소득을 창출한 것이 전부였던 사람이라면, 이번 기회에 노동 외 소득의 위력을 실감했을 것이다.
수십 퍼센트, 수백 퍼센트의 수익률이라면, 하루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고, 머릿속으로는 행복의 회로를 가동하게 된다. 좋은 집, 멋진 차, 해외여행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현실을 벗어날 그날만을 꿈꾼다. 이제 온종일 암호화폐 애플리케이션 거래 창을 바라보는 일만 남는다. 우리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아니기에 가만히 앉아서 수익률의 오르내림을 관망하고만 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장기투자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매수와 매도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일상이 시작된다. 그리되면 우리의 ‘진짜’ 일상은 사라진다.
진짜 일상이란 편안함과 평범함이 어우러진 <작은 평화>다. 거창할 건 없다. 가족들과 아침 식사하고, 일터(학교)에 나가 일(공부)하다가 퇴근(하교) 후 집으로 돌아오거나, 친구를 만나 가볍게 맥주(식사) 한잔(한끼)하면서 대화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전부다.코인 수익률 또는 손해율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해 질 무렵 되돌아올 보금자리가 꼭 자가주택일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와 따뜻한 밥 한 공기, 된장찌개를 나누며 고단한 하루를 정리할 수만 있다면, 내가 사는 집이 전세든 월세살이든 뭐 그리 대수겠는가.
한편으로는, 소박한 하루가 인생의 정답인 것도 아니다. 저마다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본인의 철학대로만 일상을 살아가기는 어렵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타인의 삶이기에, 남과 비교하지 않고 <My way>만 고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전성기, 나만 뒤처지거나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FOMO(Fear Of Missing Out) 증후군이야말로 <작은 평화>를 추구하던 우리를 코인의 세계로 이끄는 원인이 아닐까 한다.
본래 FOMO를 활용하는 건 오래된 마케팅 기법이다. 매진이 임박했다거나, 한정 수량이라는 표현으로 안분자족하는 소시민마저 흔든다. 흐름을 놓치는 건 시대에 뒤처지는 일이라며, 현명한 소비자로서 권리를 찾으라고 유혹하는데, 마냥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매진 임박, 한정 수량은 마침 비트코인에 최적화된 맞춤형 단어같기도 하다.
네이버 경제 뉴스에, 유튜브 알고리즘에 자칭 코인 전문가, 펀드-매니저가 연일 등장해 평생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라며, 지금이라도 비트코인, 다른 알트코인에 투자하라고 재촉한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서 과실이라도 따가라는데, 형편 되는대로, 아니면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서라도, 시대의 흐름에 편승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상승장에서도 피해자들은 속출한다. 24시간 개장하는 암호화폐 거래소 안 비트코인 가격은 언제나 출렁인다. 가격등락 폭이 상식을 뛰어넘는다. 김치 프리미엄은 덤이다. 타고난 강심장이라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얼마 전, 1비트코인의 가격은 9천만 원에서 8천만 원으로 추락했다가, 다시 9천만 원을 회복했다. 단 하루 사이에 말이다.
하필이면, 그날의 롤러코스터는 나도 직접 경험했다. 문제는 경착륙(Hard landing)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점이다. 떨어지는 공포감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모른다. 인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음을 실감한다.
불과 십 분 만에 한 달치 월급이 사라졌다. 더 이상 손해 봤다가는 초가삼간마저 다 태우겠다는 두려움에 눈물의 손절을 감행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내 손실금은 누군가의 이익으로 환원됐다. 가격이 원상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요, 전쟁 같은 하루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비트코인의 내재가치는커녕 1년 후 가격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코인은 믿음의 영역이라던데, 그저 내가 사면 오르고, 팔면 내렸으면 하는 야바위꾼 같은 생각을 할 뿐이다. 혹자는 가격이 계속 오르는 한, 패자는 없고, 모두 승자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딴지를 걸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뒤돌아보면, 상승기와 하락기가 확인되겠지만, 당장 오늘은 파도 같은 출렁임이 반복될 뿐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고, ‘웃는’ 자 옆에 ‘우는’ 자는 계속 양산된다. 자칫하다간 단순히 우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
코인 거래 후 업비트 앱을 삭제하지 않는 이상, 비트코인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웃는 자든, 우는 자든 마찬가지다. 누구든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하고도, 제때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곤 한다.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집단의 영향을 받는 한 개인의 선택이 비합리적인 것도 당연하다. 성실하게 살다가도 요행을 바라고,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지는 돈벼락을 맞고 싶어 한다.
신기루, 허상, 어둠의 화폐라는 비아냥만 넘치는 게 아니라, 다른 한쪽에서는 화폐 혁명, 평등의 표상, 디지털 금 소리도 듣기에, 비트코인 투자가 그나마 덜 부리는 욕심, 실속 있는 행동일 수도 있다. 선택, 결과, 책임은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시행착오의 반복이 성공을 부른다. 그러나,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묻지마 투자한 뒤 기약 없는 행운을 계속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어쩌면, 행운이 아닌 불운을 쫓는 일이다. 주식과 코인투자로 8억 정도를 벌었는데, 10억 꽉 채운 뒤 은퇴하려다가 수익률이 오히려 마이너스나서 손실본 경우도 보았다. 그는 지금도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도 안 좋다.
차라리 ‘한 방에 인생 역전’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며 사는 게 뱃속 편하다. 재화(財貨) 때문에 화(禍)만 입지 않아도 인생 반은 성공이다. 근로소득, 사업소득, 투자수익 가릴 것 없이 노력과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더 값지다. 합당한 보상이라는 만족감이 생겨야 삶의 활력도 오래간다.
일확천금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백만 원 이익이면 주변의 축하를 받지만, 억대 수익이라면 시기와 질투만 받는다. 투자자의 욕심도 한없이 커진다. 결국,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만 남게 된다. 평화로운 일상, 편안한 마음이 최고다.
투자의 첫 번째 원칙은 잃지 않는 것, 두 번째 원칙은 앞의 첫 번째 원칙을 잊지 않는 것이라 했다.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을 명언이다. 이제 주말만큼은 비트코인 창을 들여다보지 않기로 한다. 주중에 다소 <방황>하더라도, 금요일 저녁 집으로 들어가는 길마저 불태워서는 안 된다.
1994년, 이승철은 <작은 평화>를 발표했다. 작곡가는 이승철, 작사가는 채정은이다. 채정은은 1990년 김종서의 <대답 없는 너>로 데뷔했다. 임재범의 <고해>, <너를 위해>, <비상>을 작사한 실력자다. 그녀는 <너를 위해> 속 유명한 노랫말 ‘전쟁 같은 사랑’을 쓴 장본인이다.
이승철 4집 <색깔 속의 비밀>은 미국에서 제작한 앨범이다. 엄청난 투자금을 쏟아붓고도, 동명의 재즈곡 <색깔 속의 비밀>, 타이틀인 아카펠라 곡 <겨울 그림>, 록발라드 수록곡 <웃는 듯 울어 버린 나>, 그리고 마이너 발라드 <작은 평화>까지, 단 한곡도 히트하지 못했다. 가수 겸 제작자였던 이승철의 금전적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는 후문이다.
20대 후반 최고의 기량을 뿜어내던 보컬리스트 이승철도, 히트곡 메이커인 채정은도 실패를 피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꿈, 노력, 실력도 배신당한다. 성공과 실패를 쉽게 가늠할 수 없으니, <알 수 없는 인생>이다. 팝의 본고장인 미국에까지 넘어가서,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역작을 들고 호기롭게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웃지 못했다. 비트코인이 그러하듯이, 길게 보면 우상향 하는 그래프라도, 가까이서 보면 오르락내리락 출렁인다.
다행히 영원한 실패도 없다. <작은 평화> 역시 그러하다. 비록 많은 사람이 즐기는 ‘히트곡’은 아닐지언정, 분명 누군가의 인생곡일 수 있다. 특히나, 이 노래는 나의 18번이다. 소싯적에 누군가에게 어필하고 싶을 때면, 분위기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 오직 나만 아는 보석 같은 노래가 있다는 데서 오는 묘한 쾌감도 있다.
이 음악의 백미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노랫말이다. 새벽, 아침햇살, 차 한잔, 창가, 저녁, 노래, 별, 그대 그리고 나.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작은 평화>라는 속삭임이 이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치장은 없다. 오롯이 피아노 한 대에 가수의 목소리가 더해질 뿐이다. 소품 같은 일상과 사랑의 세레나데다. 담백함은 긴 여운을 남긴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군가 이 곡을 최고로 뽑는다면, <작은 평화>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다. 뒤돌아보면어느덧 가격이 올라 있는 저평가 우량주, <작은 평화>는 그런 음악이다.
이 노래를 알아본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승철이 듣고 싶은 곡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진행자였던 박준형, 박경림, 그리고 익명의 어느 청취자도 이 노래를 라이브로 신청했다.
그의 아내도 이 곡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혔다. 청혼하기 위해 그가 아내 앞에서 <작은 평화>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소 늦은 만남이기에, '전쟁 같은 사랑'을 외치기보다는, '따스한 차 한잔'을 속삭이는 편이 <고백>의 성공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30년 된 팬, 라디오 DJ, 거기에 반려자까지 픽(Pick)한 곡이라면, 이제<작은 평화>는 성공이다. 경기 초반 승부가 갈린 것처럼 보여도, 최종 결과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 설령 지금 빛을 못본대도, 언젠가 숨은진면목이 드러날 수도 있다.지금은 역주행의 시대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도 웃는 게 우리네 삶이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그게 인생이다. 출렁임에 일희일비(一喜一悲) 말고, 긴 호흡으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