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꼭 다른 사람 머릿속이 궁금하더라
얼마 전 나와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닮고 싶은 사람이 쓴 책이라며 <모든 요일의 기록>을 소개했었다.
다시 읽다 보니 나와 취향도 생각도 참 비슷한 엄마에게도 찰떡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책이 있으면 엄마한테 종종 책을 보내곤 했었는데 왜 이 책은 안 보내줬지?
우선 급한 대로, 얇게 저며 붙인 포스트잇이 가득한 내 책을 빌려줬다. 손때가 묻어서 꼬질꼬질하다고 놀리며 책을 읽기 시작한 엄마는, 다 읽고 나서 바로 한번 다시 읽고 싶다며 내 책을 아직까지 돌려주지 않았다.... 아마 더 꼬질꼬질해서 돌아올 것 같다.
엄마는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좋다고 하셨다. 읽으며 그 사람의 생각 중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고. 그녀의 다음 책인 <모든 요일의 여행>과 <하루의 취향>을 차례대로 빌려주기로 약속하고 나니, 한동안 돌아오질 않을 책들이 아쉬워 다시 꺼내 읽었다.
<하루의 취향>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역시! 나랑 닮았어.
나도 스스로를 취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초라한’이라는 단어 대신 ‘무색무취’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 내 취향은 색도 향도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뭐든지 좋았던 건 아니다. 나름 좋고 싫음이 뚜렷했으나 그것을 내 취향이라고 말하기는 왠지 모르게 창피했던 것 같다. 너무 보잘것없어서. 내 취향은 대중적인 편이고, 누구나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한다고 해서 거기에 ‘취향’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붙여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인스타그램에 부계정을 만들어 짧은 글과 사진을 쌓아 나가도 보니....’어라?’ 하는 순간들이 생겼다. 처음 마음에 드는 피드를 팔로우를 하고, 공감 가는 글을 따라 들어가 관심 작가를 등록하면서 조금씩 내 취향이 느끼 지기 시작했다.
‘팔로우를 늘리기 위해, 또는 누군가 내 브런치를 구독하도록 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계정을 구독하고 팔로 우하지 말자.’가 내 원칙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가 더 또렷하게 보였던 것 같다. 문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나 관심 분야의 글을 올리는 작가분들을 구독했고,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거나 닮고 싶은 계정을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드러난 내 취향은 여전히 대중적인 편이고, 독특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에 ‘취향’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담담한 문체가 취향이다. 일단 해보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빛을 잘 사용한 사진을 좋아한다. 책 또는 영화 리뷰가 가득한 계정에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그래서인지 출판사나 책방 계정을 많이 팔로우하는 편이다. 브런치와 인스타를 하면서 나도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그와 더불어 취향은 자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취향은 자란다
나는 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지금만큼 책을 애틋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관심을 가지다 보니 더 많이 보이고, 그러다 보니 스쳐 지나쳤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보였다. 책을 읽는 방법만 해도 그렇다. 다독이 미덕이고 완독이 기본이었던 시절 책은 조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의무감에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 좋은 게 아니라 안 읽으면 바보가 된다고 느꼈다. 책을 ‘나는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언젠가 ‘저는 책을 좋아하긴 하는데, 사실 읽는 것 보다도 그냥 ‘책’이라는 물건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에요’라고 자기 취향을 소개하는 사람을 보고 놀랐다. 저건 속으로만 생각하고 아닌 척 숨겨야 하는 이야기 아니야? 저렇게 얘기해도 되는 거야? 나름대로 꽤 충격적인 답변이었다. 내가 아닌 척 꽁꽁 숨기던 속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펼쳐 보여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었으니까. 그 후로 나도 저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사실 나도 책을 읽는 것 보다도 그냥 책이 좋았던 사람이 걸랑. 그와 동시에 책에 대한 내 편견들, 나를 붙잡아두고 있던 많은 것들이 깨졌다.
예를 들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말을 하려면 최소한 일주일에 2~3권은 읽어줘야지!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요’라고 하는 사람은 무지 현명하고 뭔가 생각이 깊은 사람이어야 해.
자기 계발서만 읽거나, 에세이만 읽으면 안 된다. 편식하면 안 된다.
책은 완독이지. 등등
그 모든 게 깨지고 나니까 세상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지금의 나는 한 번에 3~4권 정도를 동시에 읽는다. 읽다가 멈춘 책들도 꽤 있고, 읽고 싶은 부분만 뽑아 읽은 책들도 있다. 가벼운 책도 많이 읽는다. 책을 대하는 태도가 가벼워지고 나니 재미가 늘었다. 그렇게 자주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 옅었던 취향이 진해지고 좁았던 취향이 넓어진다. 취향이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난 왜 이렇게 남의 생각이 궁금할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이것도 나의 취향이었음을 깨달은 게 있다.
같은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것. (전에 같은 책을 읽을 때의 내 생각도 궁금해하기 때문에, 나는 책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꿈은 여러 사람이 같이 읽은 책들로 가득한 서재를 갖는 일이다. 내가 남긴 메모에 누군가 댓글을 남기고, 내가 좋았던 구절과는 전혀 다른 곳에 적혀있는 메모를 보는 일.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 작가가 이야기했던 ‘책친구’에서부터 자라난 꿈이다. 그런데 흥분해서 주변에 이 이야기를 하면 반 정도는 ‘재미있을 것 같네?’ 나머지 반은 ‘어어.. 괜찮네. 근데 책 읽기 안 불편할까?’ 이 정도로 나눠진다.
아니 이 엄청나고 획기적인 생각에 어떻게 저렇게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할 수 있지????
그들의 반응을 보고 나니 이렇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것도 하나의 취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다른 사람을 신경 쓰고, 남들의 반응에 민감한 나다운 취향이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에 생긴 공유서가에서 이 꿈을 사부작사부작 실현시켜보려고 한다. 나와 다른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큰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도록 선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할 것 같아 고민 중이다.
책을 좋아하는 마음과 끄적끄적 메모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 다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한 마음들이 만나니 재미난 일이 생겼다.
내 ‘취향’에, 내가 좋아하는 것에 자신이 생기고 나니 내 안에서 다채롭게 콜라보가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취향은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