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러려니 Mar 17. 2024

내가 먼저 다가가기 위해서

프롤로그

천성은 고쳐지지 않는다.

이것이 반백 살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노력해본, 내가 내린 결론이다. 수시 때때 반사적으로 고개 쳐드는 생각은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도 글을 쓸 때면, 내 글을 읽는 사람의 머리 위에 동동 떠다닐 말풍선들이 그려진다. 남들의 생각 따윈 무시해버리자는 결심이 무색하다. 천성이 결심보다 먼저 칼춤을 춘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가 뭘까?’

글을 쓰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말풍선들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이러저러한 걸 겪었다고? 좀 알아 달라고? 그래. 알겠어. 그런데 뭐 어쩌라고.’

그들의 차가운 질문을 지레짐작하며 나란 존재를 한없이 쪼그라뜨린다. 하루를 꼬박 앉아있어도 한 줄을 겨우 쓰고, 쓰고 있던 글을 지우기도 여러 번, 노트북을 덮고 돌아서기도 수십 번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써나가겠지. 참 피곤한 성격이지 않은가. 맞다. 나도 안다. 타고난 천성이 이렇게 고약하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머물러 있는,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빌어먹게도 힘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천성으로 자기혐오에 빠져 사는 삶.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도, 운전할 때도, 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그러던 나날,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타인의 시선에 갇힌 고민으로 시간 보내기 일쑤라면 그래, 해. 그렇지만 조금만 하고 이리로 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여기 있어. 나의 시선을 잊지 마. 주저앉지 마.

‘내일은. 내일은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잖아.’


상대방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려는 노력을 쥐어짰다. 그러니 되었다. 그렇게 되더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의자를 당겨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주눅 들어 주저앉지 않고 털어낼 수 있었다. 말풍선들이 털어졌다. 이런 날 꽤 마음에 들어 하며 혼자 말도 했다. 어떤 이에겐 당연한 말이지만, 나에겐 각오가 필요한 말을.

“그냥, 내가 쓰고 싶어 쓰는 거야.”

이것 또한 내가 내린 또 다른 결론. 고칠 수 없다면 길들이기라도 하겠다는 마음이 중요했다. 

천성은 다스릴 수 있다.  

   

덕분에 생애 처음 용기라는 걸 내지르기도 했다. 

2019년 11월. 글의 ㄱ도 모르던 내가 터질 듯 차오른 용기 하나만으로 참여했던 글쓰기 수업이 그것이었다. ‘뭐가 남아도 남겠지’ 정말 이 생각 하나만으로. 걱정을 안고 사는 타고난 천성을 거스른 때이기도 했다. 울렁이는 두려움과 콩닥대는 설레임이 딱지 뒤집히듯 정신없이 오갔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마냥 좋았다. 이 수업이 끝나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2020년 코로나가 번져갔으니,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포기하지 않고 저질러준 그때의 나 자신이 어찌나 어여쁜지. 그 경험을 계기로 걱정하며 망설이는 습관을 많이 버렸다. 이래저래 많이 남아 넘쳐났던 수업이었다.


글쓰기의 시작은 나만 볼 글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 쓴 글이 아니었다. 글은 아무나 쓰나.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글에 대한 이해였으니까. 그냥 쓰고 싶었다. 간간이 떠오르는 생각들이 희미하게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으므로. 주섬주섬 글로서 주워 담았다. 내 얘기를 쓰다 보니, 일상에 대한 글도 써졌다. 그러다 보니 내 글을 타인과 나누어 읽을 기회도 만들어졌다. 그때의 가슴 벅참이란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꾸미지 않은 온전한 나의 마음을 열어 보이고 상대방의 마음도 오롯이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 행복했다. 결이 맞는 이와 함께하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그때 배웠다.

    

지금까지도 마음속 깊이 남겨져 있는 말이 있다.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소망한다는 한 아가씨.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서로를 알아가며 대화를 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 했다. 구구절절 상대가 원치도 않은 이야기를 해 대는 것 또한 경우는 아닌거 같다고. 그래서 자기는 자신만의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마음이 통할 것 같은 이를 만나면 “이게 저랍니다.” 하고 건네주는 꿈을 꾼다며. 그렇게 인연을 만나가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 난 저 나이에 뭘 했나. 어쩌면 저런 생각을 가질까. 환하게 웃는 아가씨에게서 빛이 났다.

‘그래,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상상도 못 한 다른 세상이 열린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나의 시간에 스며든다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꿈이 생겼다.

    

간직만 하던 꿈이 이루고픈 꿈으로 자리 잡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혼과 함께, 관심 있는 수업을 들으러 다니던 때가 기억난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던 강의실. 공통된 관심으로 가득한 수업에 한껏 귀 기울이던 사람들. 첫 만남의 어색함은 그 안에서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곳에서 A를 만났다. 실질적으로 집에서 가장의 역할을 한다는 A는 30대 후반의 아가씨였다. 절벽 끝에 서 있는 현실적인 고비를 여러 번 넘어왔다고 미소 지으며 말하는 아가씨. 내뱉는 말의 무게 따윈 개의치 않는 깨끗하고 맑은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러함에도 어렵지 않게 그녀에 대한 이해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녀의 작은 한숨에 마음이 저릿했다. 그녀의 마음속 생채기가 내 마음속에서도 빨갛게 돋아나는 것 같았다. 그런 내가 신기했다. 배시시 삐져나오는 미소를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런 나를 보며 A가 말했다.

“전 고생을 모르는 사람하고는 안 친해요. 관심도 없어요.”

단호함이 묻어나는 확신에 찬 말투. 자기만의 울타리를 단단히 두른 A가 느껴졌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언뜻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뭐랄까, 구태여 더 듣지 않아도 그녀의 말속 행간 사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랄까. 웃고 있는 나를 보며 A는 말을 보탰다.

“우린 대화가 통하겠어요.”  

   

드물게 그럴 때가 있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긴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 같은 때. 짧은 한숨 한 번에도 그 깊이를 이해하는 눈빛을 건네주는 이를 마주할 때. 오래된 친구를 우연히 마주친 것 같은 달뜬 기분에 잔잔히 담길 때가. 꽁꽁 싸매어 꾹꾹 덮어둔 서늘한 바닥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 설명하지 않은 나의 바닥을 느껴주는 이. A는 그런 이였다.

나는 바닥이라 말하고 그녀는 절벽 끝이라 말하는 그곳. 그곳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눈물과 한숨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주고받았다. 겪어왔던 삶은 달랐지만 비슷한 그 어떤 감정의 너울에 흔들려 봤다는 것. 공유할 감정이 있다는 건, 구체적인 해결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에 냉장고 문을 열어젖힌 것과 같은 시원함을 느끼게 했다. 서로의 한숨을 편안하게 내뱉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돌아보면, 난 그런 시원함에서 받는 마음의 위로가 어떤 것보다 컸다.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 이내 가득 차는 마음. 공감이야말로 진정한 위로를 가져왔다.


부모님이 만들어 놓은 온실 속에서 바라본 세상은 분홍빛이었다. 분홍빛이 당연한 줄 알며 결혼을 했고, 무채색도 존재함을 깨달으며 이혼을 했다. 세상은 나 빼고 너무나 잘 흘러갔다. 나라는 존재는 한없이 가볍게 사라져 갔다. 남김없이 쥐어짜듯 열심히 살았음에도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일까. 난 왜 이럴까. 무기력하게 멍하니 바닥만 보며 시간이 멈췄던 때가 있었다. 눈물로 가득한 시간을 힘겹게 힘겹게 끌었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무심히 흘러가는 법. 어느덧 바닥만 보던 시선으로 주위를 훑어볼 줄 알게 되었다. 한참을 하늘도 바라본다. 좋아서 흘리는 눈물도 닦는다. 지금부터 써나갈 글들은 그 시절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혼자만 간직하려 했던 나의 이야기들을.

    

혼자인 시간을 좋아하며 외로움을 즐긴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닌가. 다정한 순간 또한 부지런히 찾아다닌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꾹꾹 누르고 사는 마음 하나쯤은 누구나 지니고 산다는 것을. 살짝 열어 주고받는 마음만으로도 시원한 숨을 들여 마실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내일을 살아갈 힘에 자그마한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순간을 소중히 간직한다. 이 책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먼저 다가가기 위해서.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을 건네받기 위해서. 결이 맞는 이들과의 행복한 순간들을 꿈꾸며 나의 이야기를 건넨다.      


“이 책이 바로 저랍니다. 전 이런 생각들을 해요. 당신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