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러려니 Apr 05. 2024

1. 착한 딸, 착한 며느리

시집살이 이야기

“아유, 착하네”   

  

참 많이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듣고 또 들어도 지겹지 않은 칭찬이었다. 이왕이면 넘치는 칭찬 중에 팔 할 이상이 공부에 집중되었다면 좋았을 것을. 안타깝게도 공부만 쏙 뺀 모든 것에 칭찬이 넘쳤다. 눈으로 책을 보고 있어도 머릿속은 언제나 부모님과 친구들의 표정과 말들이 떠올랐다. 화난 걸까, 기쁜 걸까. 아니면 무엇을 원하는 걸까.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마치 그것이 내가 풀어내야 하는 숙제처럼.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데?’ 언감생심, 이런 말은 내 사전엔 없었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생각을 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이유 따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기억이란 것을 해낼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난 늘 그랬었다. 그 시절들이 가득하다. 그 중 유난히 들여다보게 되는 선명한 두 기억이 있다.  

    

열 살이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아빠 모임에서 가족들과 함께 계곡으로 놀러 갔을 때가 기억난다. 모두가 무릎까지 오는 얕은 계곡물을 오가며 홍합처럼 까만 조개를 찾고 있었다. 홍합이 계곡에 있나? 모르겠다. 하여튼 허리를 숙여 열심이었다. 가족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도 한몫했다. 돌멩이를 이리저리 젖히다 보면 미처 숨지 못한 조개가 엉덩이만 쏙 내민 채 박혀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개에게는 참 몹쓸 짓이었지만 그땐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비닐에 소복이 담기는 조개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허리 아픈 줄도 모른 채 돌멩이 젖히기에 열심히 던 그때 살랑이는 바람에 실린 엄마의 말이 귓가를 간질거렸다. 

“나는 왜 안 보이지? 아무리 봐도 없어.” 

그때부터 내 시선은 엄마에게로 꽂혔다. 누가 더 많이 모으냐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재밌는 걸 엄마가 못하고 있다니. 조급증이 났다. 너무 재미있는데. 엄마도 그래야 하는데. 내 머릿속은 엄마로 가득했다. 슬금슬금 엄마에게서 떨어져 내 것을 재빨리 돌멩이 밑에 숨겼다. 그리곤 소리쳤다. 

“엄마! 여기로 와봐. 여기 있을 것 같아. 빨리 와봐.” 엄마는 웃으며 다가왔고, 얌전히 숨어있는 조개를 들어 보이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네. 진짜 있어.” 

혹여 누가 볼까 몰래 숨기는 두근거림과 시원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던 두근거림.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난 조개를 모으는 기쁨보다 엄마의 웃음이 더 기뻤고 뿌듯했다.  

   

또 하나의 기억은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 6학년 아마도 그쯤이었다. 혼자 목욕탕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나와 같은 결의 상식을 지닌 분들은 이해할 것이다. 수도꼭지를 잠글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볼 때의 분노. 그들을 씩씩거리며 쳐다보는 나를. 목욕탕을 오면 그런 사람들은 꼭 있었다. 얼마나 꼴 보기 싫고 거슬렸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뭐라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저 흘러넘치는 물을 보며 때나 밀 수밖에. 그들이 버려대는 물을 나라도 주워 담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수도꼭지를 더 철저히 잠가 댔다. 

“아유, 착하네”

응? 이런 말이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발가벗은 중년의 아주머니께서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어쩌면 그렇게 행동이 참하니. 아줌마도 너 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그들을 지켜보듯, 아주머니도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당황스러웠으니까. 그렇지만 좋은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나를 칭찬해 준다는 것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의미도 있는 거니까. 그것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수도꼭지를 잘 잠그는 아주머니는 당연한 상식을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그분의 칭찬은 내 생각이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과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동동 떠다니는 듯했었다.

     

왜 이 두 가지가 도드라지게 솟아오른 기억으로 남았을까? 그저 칭찬이 인상 깊었던 기억이라 치부해왔을 뿐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니 이제야 알겠다. 저 안에 있는 도드라진 인정이 보인다. 그저 웃음만 난다. 그랬다. 생각해 보면 단순히 ‘착하다’는 칭찬 하나만으로 기분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칭찬 속에 들어있는 인정에서 만족을 찾았다. 타인이 해주는 칭찬은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내가 잘하고 있음을 그렇게 확인하는 거였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의 생존 방식이랄까. 어릴수록 칭찬은 그저 잘한다는 칭찬으로만 받아도 되는데. 기분 째진다는 표현도 해 가며 한껏 즐기기만 해도 충분한데. 그러지 못한 나는 칭찬을 분석하며 타인의 인정을 갈구했다. 칭찬은 날 안심시켰다. 그렇게 스무 살을 넘겼고 대학 졸업도 전에 결혼 얘기가 나왔다.  

   

아빠는 결혼을 반대했었다.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우리 집과 예비 사위 S의 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것.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내가 마음고생이 있을 거라는 것. 그것이 아빠의 고민이었다. 

“아무래도 S네 아빠는 아빠보다 많이 가부장적이니까. 그걸 걱정하는 거지.” 

마주 보고 얘기하는 엄마의 얼굴에도 걱정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난 부모님만큼 걱정되지 않았다. 대학 시절 통금시간도 9시였고, 아르바이트도 허락받아야 하는 우리 집도 만만찮은 곳이었으니까. 나에겐 가부장적인 S의 부모님이 우리 부모님의 업그레이드 정도로만 다가왔다. 사랑의 콩깍지라는 것이 본디 이렇게 강력하다. 자신 있었다. 모르는 분들도 아니고.  

   

아빠와 아버님은 같은 계모임 멤버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함께 가족 모임과 여행을 즐겨 했었다. 첫 기억 속의 계곡에서도 같이 조개를 찾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서로가 자란 환경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대로 나와 S 오빠가 결혼한다면, 말 그대로 친한 오빠가 아기 아빠가 되는 경우가 될 터였다. 데이트 후 집으로 데려다주던 S와 아빠가 맞닥트리며 우리의 연애가 들켰고, 자연스럽게 둘이 사귄다는 얘기가 S의 부모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망설이는 우리 부모님과 달리, S의 아버지는 결혼을 밀어붙였다. 그때부터 우리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결혼하자는 얘기도, 프로포즈를 받은 기억도 없건만 청첩장을 찍어 대고 있었으니. 어쩐지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맞는 건가? 다들 이런 건가?’  

   

단지 사귄다는 말만 나왔을 뿐인데 S의 아버지는 아빠에게 우리의 결혼을 의논했다. 무슨 정략결혼도 아니고. 양가 어른과 함께하는 해외여행을 가자며 신혼여행은 간단히 차를 몰고 설악산을 다녀오는 걸로 대체하고, 시댁 식구들과 화목하게 어우러지는 시집살이를 결정하고, 이 모든 것이 시아버님의 결정에 좌우되었다. 내키지 않으셨던 아빠였지만 딸자식이 S가 좋다고 하니 달리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곱게 키워 좋은 신랑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부모의 최대 덕목이라 여기셨던 우리 부모님. 자연스레 을의 입장이 되어있었다. 좋아서 사귀는 건 맞지만, 결혼은 나를 쏙 빼고 가는 느낌. 마치 내 결혼을 구경하는 느낌이 들었다.  


“얘야.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니?”

“네, 전 괜찮아요. 아버님”  

   

‘잠깐만, 이게 뭐지?’라는 마음의 속삭임은 꿀떡 삼켰다. 마치 나쁜 아이가 되는 기분이었으니까. 그 뒤엔 당연히 칭찬이 돌아왔다. 칭찬은 깨진 살얼음 같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다들 착하다고 그러잖아. 난 잘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걸 꺼야. 멀뚱멀뚱 결과만을 들었다. 집안 살림이라고는 라면 끓이는 게 다였던 나를 엄마는 끝까지 설거지조차 시키지 않았다. 어차피 시집가면 많이 하게 될 거라며. ‘내가 설거지하러 결혼하는 거야?’라는 건방진 생각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을 앞둔 나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으셨다. 두 분의 미소는 불안한 내 마음을 안심시켰다.


딸자식 기 살리겠다며 2.5톤 트럭 2대분의 이바지 음식을 만든 엄마. 이바지 음식과 함께 딸자식을 시댁에 데려다주며 5살 아이처럼 엉엉 울던 아빠. 

“잘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가 된 아빠를 꼭 안으며 같이 울었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애잔한 마음을 한 톨도 흘리지 않고 우걱우걱 먹으며 다짐했었다. 잘해야 한다. 두 집안 사이에서 내 역할이 중요하다. 다년간 굳어져 온 착한 딸 노릇의 정점이었다. 남북통일 만큼이나 비장한 다짐이었다. 불안을 누르던 나 자신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마음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바빴으니까. 늘 그랬듯이. 어느새 나는 가족 간의 화목을 책임지는 비장한 관리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결혼의 목표인 것처럼. 

      

나는 착한 딸에서 나무랄 데 없는 착한 며느리가 될 준비가 되어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먼저 다가가기 위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