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강국 독일이 축구 월드컵에서 처음 우승한 해는 1954년이다. 2차 대전 패전국으로 전쟁의 후유증을 어렵게 헤쳐나가고 있던 독일 국민들은 국민적 자존감은 바닥에 내려앉은 채 향토 영화나 보면서 마음을 달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결승전에 올라간 독일은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헝가리를 맞아 3대 2로 기적처럼 승리했다. 승리의 희열은 열광적인 축제를 통해 범국민적으로 공유되었고, 독일인들의 집단적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74년 뮌헨 월드컵에서 두 번째로 우승하면서 20년 전의 베른 월드컵이 다시 떠올랐지만, 1980년대를 지나면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4년에 ZDF라는 독일 공영방송에서〈베른의 기적〉이라는 다큐가 방영되면서 베른 월드컵은 다시 기억에 소환된다. 베른 월드컵의 우승은 그때부터 엄청난 의미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스포츠사의 쾌거일 뿐인데 "제2의 건국기념일", "독일 성공모델의 시작'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되거나 당시 대표팀 감독을 신화적인 인물로 떠받들기도 했다. 이런 호들갑은 기억 정치의 일환이다. 1990년 독일 통일 후 드러난 독일 사회 내적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한 민족이다'라는 구호처럼 민족적 유대감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공유해온 기억에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되고 미디어를 통해 반복적으로 소환되고 기념됨으로써 그것은 '문화적 기억'이 된다. TV가 아직 널리 보급되지 못하던 1950년대에 결승전을 중계하던 찜머만의 목소리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로 집단의 기억에 각인되었다. 아스만이라는 학자는 이러한 과정을 "저장 기억"에서 "기능 기억"으로의 변화라고 말한다.
기억의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기억을 기능화하면, 사회적인 필요에 일시적으로 부합할지는 모르지만 생산적인 기억이 되기는 어렵다. 기억이 생산적인가의 여부는 그것이 반복적인 강화에 불과한가 아니면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기억인가에 달려 있다. 즉 잊고 있던 것이 되살아나는 경험이 가능한가 가 중요하다. 지금까지 망각하고 있던 것을 통한 기억의 보완, 확장, 교정은 집단의 차원에서도, 개인의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기억의 주체로서 개인 역시 기억을 통해 부단히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고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보완, 확장, 교정한다. 기억 작업을 문학적으로 극대화한 작가를 꼽으라면 프루스트를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시각에서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독창성을 탁월하게 입증해낸다. 벤야민에 의하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생애 전체를 정신이 최고도로 깨어있는 상태로 충전하려는 부단한 시도"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이른바 "무의지적인 기억이 이룬 작품이고, 거역할 수 없는 나이 듦에 대적하는 회생의 힘이 이룬 작품이다." 무의지적인 기억은 프루스트가 쓴 표현이다. 어느 날 프루스트는 우연히 마들렌 과자를 맛보다 유년시절에 먹어본 마들렌 과자가 떠올랐고 이어 꽁브레 마을에서 보낸 유년시절 전체가 떠올랐다고 했다. 프루스트는 망각된 것을 불러내는 힘을 가진 것은 의지적 기억이 아니라 무의지적 기억임을 강조한다. 오랜 세월 망각되어 있다가 기억해낼 수 있는 이유는 망각하고 있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이 의식의 저 아래에 존재하고 또 작용하고 있듯이, 망각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망각이 밤새 우리의 내면에 짜 놓은 양탄자, 살아온 삶의 양탄자 중 단지 몇 가닥을 힘없고 느슨하게 손으로 붙들 뿐이다. 매일 낮은 목적에 결부된 행동, 그리고 그보다 더 목적에 사로잡힌 기억하기를 통해서 망각이 직조한 것을 풀어버린다." 이처럼 풀어헤쳐지는 직물의 코가 다시 바짝 당겨지는 순간이 무의지적 기억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그 순간 생생하게 드러나는 직물(=텍스트) 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직물 안에 짜인 사건, 사물, 이미지는 기억하기 전에는 결코 제대로 의식해본 적이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기억은 지난 삶의 연속적 흐름을 재구성하는 자서전의 기억과는 다르다. 자서전에서는 기억하는 주체의 관점이 우선권을 가지고 과거를 장악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무의지적 기억에서는 기억의 현상판에 무언가가 의미심장하게 떠오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광판에 필요한 빛을 가로막는 관습의 장막이 치워져야 한다."우리의 깨어있는, 익숙한, 대낮의 자아"라는 울타리가 그러한 장막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울타리를 벗을 줄 알아야 한다. 이때 비로소 "살아온 삶의 암실에서 이미지들이 현상되고", "기억의 부채를 펼칠 때마다 부챗살 틈에서 새로운 이미지들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이미지들을 얻을 수 있느냐는 우연에 달려있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벤야민은 무의지적 기억이 지닌 생산성에 대해 프루스트로부터 배우고자 하면서도, 기억의 생산성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역사적 인식에 적용하고자 했다. 프루스트의 치명적인 매력을 벗어나면서 벤야민은 무의지적 기억을 집단적인 차원으로 확장하고, 그것을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인식이 지향해야 할 목표로 설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