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꿈 이야기는 주로『일방통행로』와 유년시절 회상에 나온다.『일방통행로』에서는 괴테를 만난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꿈속에서 벤야민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 노년의 괴테를 만나는데 아주 작고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그 서재는 바이마르에 있던 괴테 집과는 전혀 다르다. 벤야민은 괴테에게서 작은 꽃병을 하나 선물 받고는 손에 들고 돌려보는데 방 안에 열기가 가득 찼다. 괴테와 함께 옆방으로 가보니 긴 식탁이 차려져 있어 벤야민은 괴테 바로 옆자리에 앉는다. 식사가 끝나고 힘들게 일어나는 괴테를 부축하다가 괴테의 팔꿈치에 몸이 닿자 감격에 겨워 울기 시작했다. (괴테 꿈 이야기에서 울기 시작했다고 한 다음에 "깼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다. 꿈에서 울기 시작하면 그 충격으로 꿈에서 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면서 깨는 자신을 발견한다.) 벤야민은 왜 이런 꿈을 발표한 것일까? 세계 문학의 성전에 오른 괴테에게 갖던 경외심과 숭배심이 꿈으로 표출된 것인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꿈을 발표한 비슷한 시기(1920년대 중반)에 벤야민은 당시의 괴테 숭배 분위기에 일침을 가한 비평(괴테의 소설『친화력』에 대한 비평)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괴테가 대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를 우상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꿈에서는 노년의 괴테를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신성과 아우라를 지닌 인물로 떠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친화력 비평에서 벤야민은 작가의 삶은 신적인 것도 영웅적인 것도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가는 근본 원인이거나 창조자가 아니라 원천 혹은 조형자일 뿐이고, 그의 작품은 결코 창조자의 피조물이 아니라 조형자의 구성물이다."
벤야민은 알레고리가 지배적인 17세기 독일 바로크 드라마 연구를 시작할 때부터 괴테가 대변하는 상징과 아름다운 가상의 미학을 극복하고자 했다. 학문의 차원에서 괴테 넘어서기인 셈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비평가는 예술작품이 제시하는 아름다운 가상을 분해하고 그것이 분해된 자리에 드러나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
"삶과의 인접성 없이 예술의 아름다움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가상이 예술의 본질을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예술의 본질은 더 깊이 내려가 오히려 예술작품에서 가상과는 반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괴테 문학을 전범으로 삼는 전통에서 아름다운 가상은 진리의 가시화된 표현이라고 공식화되곤 했는데, 벤야민은 이 공식을 깨뜨리고자 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카오스의 잔재로 아직 남아있는 것, 즉 거짓된 총체성을 분쇄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비로소 작품을 완성하며, 작품을 파편으로 분쇄하여 그것을 진실한 세계의 단편으로, 상징의 토르소로 만든다." 만년의 괴테가 남긴 소설 『친화력』과 소설에 대한 벤야민의 긴 비평을 읽어봐야 벤야민이 괴테의 문학을 어떤 관점에서 넘어서고자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괴테의 이 소설은 가장 잘 알려진 그의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보다는 재밌지만, 벤야민의 철학적 비평은 독해를 방해하는 암초를 많은 곳에 숨기고 있어 읽기 쉽진 않다.)
다시 괴테 꿈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비평에서 괴테 넘어서기가 벤야민의 확실한 의도라면, 괴테 꿈에 대한 기록 역시 그러한 의도의 연장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벤야민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괴테 넘어서기를 의도했더라도 괴테의 문학적 업적에 대한 경외심, 권위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권위에 대놓고 맞서곤 했던 절친 브레히트와는 달랐던 것 같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꿈을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꿈의 "건너편 강가, 즉 기억의 우월한 위치"에 서서 "꿈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이다. 우리가 꾸는 모든 꿈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억나는 꿈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데, 기억난 꿈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꿈의 여운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난 후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꿈을 누설하다 보면 "꿈의 세계로부터의 복수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꿈을 지배하는 몽롱한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증폭되어 현실 생활에 곤란을 겪을 수 있다. 벤야민이 도입한 꿈 개념은 개인이 자면서 꾸는 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이 관심을 오랫동안 기울인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법칙을 교란시키는 꿈의 세계를 사유의 굳은 표면을 깨뜨리기 위한 문학적 전략의 모델로 삼았다.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자들의 꿈결 같은 이야기를 한동안 경청하다가 비판적이 되는데, 이는 그들의 꿈 이야기가 자칫 잠꼬대에 머물 위험을 지니기 때문이다. 모든 꿈은 깨어남을 지향해야 하는데, 초현실주의자들은 깨어남을 거부했다고 벤야민은 비판한다.
꿈 이야기가 잠꼬대처럼 들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처럼 꿈을 퍼즐처럼 짜 맞추며 해석하는 기술을 갖춰야 할까? 이러한 기술은 꿈을 꾸는 사람과 꿈을 분석하는 사람을 엄격히 구분하는 반면, 벤야민이 중요시한 꿈 이야기에서 양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진실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꿈은, 꿈 분석가가 논증적으로 분석해주는 의미가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주체 스스로에게 명확해진 그런 의미로 다가오는 꿈이다. 벤야민은 우리는 꿈을 꾸면서 현실의 법칙을 비판하고 현실을 초월하지만, 그 꿈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동화〈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개작하면서 벤야민은 잠자는 공주를 깨운 것은 "백마 탄 왕자의 키스"가 아니라 궁전 "주방장이 시동의 따귀를 때리는 소리"라고 말한다. 백마 탄 왕자의 키스는 몽상적인 상태를 더욱 몽상적으로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면, 따귀 소리는 따귀를 맞는 사람이나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괴테 꿈에 대해 벤야민은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다만 괴테 꿈은 그가 문학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기 위해 어떻게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건너왔는가를 분명하게 떠올리게 한 계기가 된다.
비록 전치와 압축의 변형 과정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꿈의 세계는 억압된 무의식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꿈에 대해 평소 억압된 슬픔, 욕망, 자책, 죄의식 등을 스스로 추론해내곤 한다. 그런데 그 추론 역시 자의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정말로 억압된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간에 평소 어렴풋하게 의식하긴 해도 자꾸 눌러서 밝은 대낮의 의식 저 아래로 밀려나 쌓여 있던 것이 꿈의 소재를 이룬다. 꿈은 그렇게 억압된 것이 의식화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억압된 것이 행사하는 힘에 아직도 지배되고 있는 사람은 꿈 이야기를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16년 이상 항상 곁에 있던 우리 집의 반려견 썬더에 대해 꾼 꿈이 그렇다. 썬더는 신부전으로 아파 고생하다 작년 가을 무지개 나라로 떠난 후 몇 달이 지니서야 처음으로 꿈에 나타났다. 썬더가 깊은 우물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복도 건너편의 어느 외국인에게 아이를 꺼내 달라고 사정한다. 잘 꺼낼 수 있을까 걱정할 틈도 없이 벌써 우물 바닥에 던진 작은 소쿠리에 담겨 아이가 위로 올라왔다. 물에 흠뻑 젖어 있는 썬더는 생전에 목욕시킬 때처럼 비 맞은 생쥐 같다. 나는 흠뻑 젖어 밤톨만 한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면서 '아이를 집에 데리고 가도 될까?'라고 자문한다. 그러다 갑자기 '아, 집에 데리고 가도 되지 뭐가 문제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미안해, 집에 데리고 갈게, 가서 맛있는 거 줄게"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다 꿈에서 깼다. 이 꿈을 꾸고 나서도 한동안 글로 기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떠나보내기 전에 겪은 여러 가지 일과 완벽하게 거리를 둘만한 심적 상태가 아니고, 존재의 필연적 법칙을 받아들일 맷집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