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애 Nov 10. 2020

또 다른 행복론: 미완의 행복을 기억하며 단단해지기

세간에 행복론은 차고 넘친다. 행복의 조건들에 대한 글도, 말도 너무 많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별로 고민해본 적은 없다. 늘 행복해서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다.(그럴 리가 없으니까!)  행복이라는 감정을 적극적으로 느껴본 적도 별로 없다. 오히려 나는 '그때가 좋았다'라는 식으로밖에는 행복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한다. 행복의 이미지를 늘 과거 시제로만 떠올리는 사람은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셈이다. 행복한 순간이 있음은 인정할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행복도 과연 있는 것일지는 의문이다. 언젠가 TV 방송에서 독일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 이야기를 다룬 TV 방송 프로를  본 적이 있다. 한국이 좋아 한국에 눌러 살기로 한 독일인 남편은 주한 독일 대사관에서 통역사로 일하다가 같은 직장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어느 대학 독문과에 재직하다 은퇴한 남편은 아내와 뜻을 모아 시골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전남 담양 대나무 숲에 멋진 생활 한옥을 짓고 산다. 부부는 그곳에서 채소를 심고 길러 먹는 일도 하지만 공방을 만들어 밀랍초도 만든다. 제법 가내 기업 정도의 규모를 가진 공방이다. 벌집을 이용한 밀랍 초는 만들기 쉽지 않아서 남편은 고향 독일에까지 가서 기술을 배워 왔다고 한다. 밀랍초를 만드는 일 외에도 부부는 시간을 쪼개 공동으로 번역도 하고 마을 주민들과 차도 마시고 교제하면서 다채로운 시골생활을 하고 있다.

'또 다른 행복론'이라는 제목을 단 글을 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한국인 아내가 프로 끝무렵에 한 말 때문이다. 머리는 반백이지만 동안의 얼굴인 아내는 남편과 너무나도 사이가 좋아 보이고, 밭에서 일할 때든 남편과 공동으로 번역 일을 할 때든 공방에서 밀랍초를 만들 때든 마을 주민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이야기 꽃을 피울 때든 늘 즐거워 보인다. 아내는 담당 PD에게 "매일매일이 정말 너무 행복해요."라고 말한다. 이 말이 꾸미거나 과장된 말로 들리지는 않았는데도 놀라운  말로 들렸다. 행복을 소극적으로만(무엇이 없지 않다는 식으로, 즉 부정의 부정으로만) 혹은 과거 시제로만(그때가 행복했다는 식으로) 떠올리는 내 사고 습관에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행복에 대해 긴 성찰을 늘어놓은 적은 없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몇몇 구절은 있다. 마지막 텍스트인「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는 우리가 품는 행복의 이미지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하는 구절이 나온다.


 "행복의 이미지는 우리 고유의 삶의 궤적이 우리로 하여금 지나오게 한 시간으로 채색되어 있다. 우리에게 부러움을 일깨울 수 있을 행복은 우리가 숨 쉬던 공기 속에만 존재한다. 우리가  말을 걸 수도 있었을 사람들, 우리 품에 안길 수도 있었을 여인들과 함께 숨 쉬던 그 공기 속에만."


'말을 걸 수도 있었을', "안길 수도 있었을"'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 완전한 주인이 되지 못한다. 이것을 깨닫는 계기는 기억이다. 기억 속에서 우리는 과거에 이미 실현된 행복이 아니라 실현되지 못한 행복, 미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행복한 순간, 행복한 삶에 대한 이미지는 과거에 미완에 그친 것에서 유래한다. 미완의 행복을 떠올린다고 해서 그것이 놓친 행복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완의 행복'이라는 말은 그것이 과거에 실현되지 못한 행복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이 미완인 이유는 기억 속에서 늘 현재화될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대하는 벤야민의 태도는 자신의 개인적 과거를 대하든(『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집단의 과거를 대하든 (『파사주 프로젝트』) 향수나 비애와는 무관한다. 벤야민은 과거를 향한 동경, 향수, 감정이입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년시절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다짐한다. "동경이라는 감정이 정신을 지배하는 주인이 될 수는 없다...나는 동경의 감정을 통찰을 통해서 억제하고자 했다." 과거에 완성된 행복이 아니라 미완의 행복을 기억하면 장점이 있다. 완성된 행복에 대한 기억은 동경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그치기 때문에 현재의 나는 오히려 무력해질 수 있다.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기억은 발굴이지만 과거의 이미지들을 발굴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느 장소에서 발굴하느냐에 따라 발굴된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발굴된 물건들의 목록에만 신경을 쓰고 옛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를 오늘의 대지 위에 표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는 셈이다. 그렇듯 진정한 기억들은 어떤 사실을 보고한다기보다는  그 기억들이 떠오르게 된 바로 그 장소를 표시해야 한다."


발굴된 장소를 오늘의 대지 위에 표시할 수 있어야지 과거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는 단단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발굴된 귀중품들은 발굴로 인해  원래 그것이 속해있던 시간에서 떨어져 나와  "우리들이 나중에 얻게 되는 통찰의 냉정한 방에 놓인다."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에게 내건 벤야민의 이러한 요구는 사실 엄격하기 짝이 없다. 과거를 이상화하며 과거에 누렸다고 생각하는 행복을 되돌아보며 노스탤지어에 젖거나 비애에 젖거나 할 뿐인 우리에게 말이다. 중요한 것은 행복하다는 감정이 아니라 행복의 이미지로 기억(=구원)할만한 가치가 있는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때그때 느끼는 행복의 감정은 사람마다 감수성이 달라서(내 경우는 낮은 듯하다) 주관적이고 가변적이나,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행복의 이미지들은 현재에 단단하게 자리 잡을 수 있다. 누구나 가만히 되돌아보면 자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는 듯한 이미지들이 떠오를 수 있다. 내 경우는 서울 공덕동의 한 언덕에 있던 유치원(물론 유치원도, 유치원이 있던 동네도 싹 다 사라졌다. 아파트촌으로 뒤덮여버리는 바람에) 시절과 연관된 이미지이다. 간식 시간에 빙 둘러앉은 아이들에게 건네주던 코코아 잔이 그렇다. 쵸콜릭 색의 플라스틱 머그잔이었다. 코코아 잔처럼 사소한 사물이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고, 그것을 왜 미완의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또 그것이 과거에 속한 사물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어떻게 따뜻하게 감싸는 원천이 되는지는 구체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이 한 다음 말로 길어진 이 글을 끝맺기로 한다.


"학문이 확정한 것을 기억은 수정할 수 있다. 기억은 완결되지 않은 것(행복)을 완결된 것으로 만들며, 완결된 것(고통)을 완결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벤야민과 괴테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