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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애 Jan 15. 2022

유년의 기억과 영화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의 기억하기. 우울한 시선과 희망의 신호 사이에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후 우리는 과거가 비록 망각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안다. 유년기도 마찬가지이다. 그중에는 이미 기억의 조명을 받아 드러난 부분도 있고 어두운 배경에 머물러 있는 부분도 있다. 우리는 어릴 적 사진첩을 들쳐보거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년기를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발적인 기억의 노력에서 얻는 수확이 그다지 크지 않다. 수확의 양도 그렇고 질도 그렇다. 특히 질적인 차원에서 그렇다. 진정한 기억에서는 과거에 대한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의 경험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기억의 구도로 짜인 영화 〈가위 바위 보〉에 이러한 근본적 질문을 가지고 다가가 본다.    

손광주 작가는 아뜰리에 아르메스로부터 ‘다른 곳’이라는 전시 주제를 받고 뜬금없이 ‘가위 바위 보’라고 외치는 아이들 소리가 떠올랐다고 한다. 내면에서 들려온 이 소리가 기억력에서 온 것인지 상상력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작가는 우연히 마주친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것을 의미심장한 기호, 즉 그 안에 어떤 의미가 감싸여 있는 기호로 받아들인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맛보다가 돌연 심상치 않다고 느낀 프루스트처럼. 프루스트는 마들렌 과자의 맛에서 콩브레의 고모님 댁에서 맛보던 마들렌 과자 맛이 생각났고 여기서 출발해서 콩브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전에는 기껏해야 매일 저녁에 치른 행사, 즉 어머니와의 작별 키스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는데 돌연 콩브레의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과자의 맛을 기호라고 부른 것은 그 안에 콩브레라는 내용물이 담긴 용기라는 의미에서이다. 프루스트가 ‘비자발적 기억’이라고 표현한 기억은 이런 의미의 기호를 얼마나 많이 만나는 가에 달려 있다. 

프루스트가 최초의 기억을 확장시키면서 펜과 종이만으로 작업했다면, 손광주는 청각적 인상을 지렛대 삼아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로 된 다매체적 기억 공간을 만든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파편적인 모습을 담은 모든 장면은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와 회고에 의해 굴절된 과거의 이미지로 이중화된다. 놀이터 풍경이 현재의 풍경이자 기억의 풍경임은 여러 장치를 통해 드러난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라는 한 문장짜리 텍스트는 회고하는 1인칭 화자의 틀 이야기 구도를 분명히 하고, 곳곳에 삽입된 전등 이미지는 섬광처럼 일순간 떠오르는 기억 작용을 상징한다. 사다리꼴의 하얀 실루엣으로 표현된 전등은 치직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장면과 겹쳐 나오거나 단독 컷으로 나온다. 

아기 소리가 들리는 텍스트 장면에서 아이들의 놀이 장면 사이에는 제트 비행기가 나는 듯한 굉음이 삽입된다. 현실의 시간과는 비교가 안 되게 단번에 기억의 책장을 넘기는 엄청난 속도를 비유하는 소리 같다. 원래 놀이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행복한 유년을 환기시키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동시에 회고하는 놀이 풍경은 그렇지 않다. 놀이는 싸움으로 끝나고, 아이들의 펜싱시합에서 보듯 승패를 향한 경쟁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싸움 장면에 삽입된 망가진 라디오 소리 같은 효과음은 갈등과 불협화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아이들의 세계는 경쟁하고 싸우고 지배하는 어른들 세계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어른들 세계에서 일어나는 가차 없는 자연 지배는 과장되게 확대된 동물 내장을 거침없이 바르는 장면에서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로 비유된다. 정글짐에 앉은 아이가 “혁명은 실패했다”라고 독백할 때 그것은 아이가 장차 살아갈 삶, 현재의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예언으로 보인다. 실패한 혁명에서는 의미의 파편들이 생기고 개인의 삶과 집단의 삶 모두에서 부단히 쌓여가는 파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기억 주체의 우울한 시선은 유년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 어른의 삶과 세계에 대한 기억으로 확장된다. 이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불규칙적이고 자유분방한 발걸음이 나무 계단에 오버랩된 규칙적이고 빠른 발걸음으로 변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오버랩은 개인적 과거와 집단적 과거의 겹침을 시각화한다. 개인적 과거를 놀이터 장면의 이미지들에 집중해서 떠올리듯이 집단적 과거 역시 서사적 흐름으로 그려지기보다는 불연속적으로 교체되는 이미지들에 응축되어 제시된다. 고층 빌딩의 건설 현장과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이미지는 성장과 속도라는 긍정적인 가치를 구현한 듯 보인다. 그러나 어둡고 우중충한 하늘을 찌르듯 솟아있는 기중기와 엉켜 붙은 거대한 석탄 더미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어딘지 불길해 보인다. 성장과 속도를 나타내는 이미지 시퀀스가 폐품과 쓰레기를 처리하는 기계 장면으로 귀결되면서 이미지 시퀀스 전체의 의미는 부정적으로 전환된다. 성장 지상주의, 속도와 유행을 숭배하는 사회의 실체는 앞으로 전진 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긴 터널의 이미지로 압축된다. 개인의 삶이 생물학적 죽음으로 종말을 맞는다면(땅에 묻히는 유골함 장면), 집단의 역사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상징된다. 무음으로 처리된 터널 장면은 출구와 빛도 보이지 않은 채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서 일어나는 전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나마 암울한 터널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것은 자동차의 속도감이다.     

터널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 채 영화는 가위 바위 보의 세상으로 되돌아간다. 싸우고 울고 풀잎을 마구 짓밟던 아이들이 더는 싸우지 않고, 줄넘기도 하고 피구도 하면서 놀이에 몰두한다. 상상력을 펼치는 아이들의 놀이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로 본 푸코의 시선을 따라, 유년의 세계에서 현실을 반박하는 대안의 공간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유년의 세계는 그만한 잠재력을 충분히 지닌다. 세상과의 첫 만남에서 오는 행복감, 상상력 속에서 세상과 교감하기, 목적을 따지지 않는 순수함 등 유년의 지각방식은 어른이 되면서 점차로 상실한 것에 속한다. 앞의 질문을 가지고 이어진 장면들을 보자. 이미지들을 압도하듯 모차르트 소야곡의 오르골 연주 소리가 현실을 변용시키는 마법의 지팡이처럼 모든 장면에 동화 같은 분위기를 선사한다. 점차로 느려지는 오르골 소리 아래에서 천천히 구르는 기차 바퀴, 뒤로 나는 비행기, 굴뚝으로 도로 빨려 들어가는 연기, 빙글빙글 도는 놀이기구들의 이미지가 모두 그러한 환상적인 분위기에 일조한다. 

사운드의 이런 효과가 없었다면 후진과 순환의 모티프는 전진과 진보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만 해독되었을 것이다. 앞서 나온 비단고동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혁명은 실패했다”고 고백하는데도 “광선보다도 빠르게 미래로 달아나라”고 혁명의 유령이 속삭이자 비단고동이 나타난다. 비단고동의 굼뜬 동작은 혁명의 유령이 재촉하는 광선의 속도에 대한 극단적인 이의 제기이다. 비단고동이 다시 환기되면서 모래밭에 남긴 자취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부지런한 비단고동들은 목표점을 향한 최단의 직선이 아니라 모색하듯 신중한 동작에서 비롯된 구불구불한 곡선을 남긴다. 직선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이러한 곡선은 진보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박을 넘어 대안적 세상을 꿈꾸게 해주는 이미지가 된다. 다시 회고된 유년의 놀이 세계도 처음과는 다른 의미로 해독될 수 있다. 즉 그 안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실패한 삶의 전조가 아니라 현재에 이르러서도 아직 오지 않은 보다 나은 미래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기억과 상상이 혼합된 새로운 장면들은 과거에서 우울을 가져다주는 파편들이 아니라 희망의 신호들을 찾는 시선을 함축하는 공간으로 읽을 수 있다.    

엔딩 크레디트가 시작된 이후에 등장하는 아기는 그 의미가 애매모호하다. 뒤통수만 보이는 부스스한 머리털을 보니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도입부에서 소리로만 들렸던 아기는 1인칭 화자의 회고 속 아기임이 분명한 반면, 결말부에서 아기의 지위는 모호하다. 먼저 꿈에서 깨어나는 아기라는 설정은 영화에서 이야기한 모든 것을 아기가 꾼 꿈으로 환원하는 해석으로 유도한다. 영화에서 제시된 것이 모두 아기가 꾼 꿈이라면 아기의 꿈은 예지몽이 되고 아기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다 알고 태어난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기억하기의 구도는 깨어남의 구도와 동일하다는 관점에 따라 잠에서 깬 아기를 기억의 주체로 상정할 수 있다. 깨어나기 전에는 꿈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듯이, 과거 역시 기억해내기 전에는 한번도 의식에 떠오른 적이 없다. 기억을 깨어남의 구도로 보는 관점에서는 과거를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기억 주체의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기억 주체에게 “지나간 것은 깨어난 의식에 떠오른 착상”이 된다. 

마지막으로 엔딩의 아기를 기억의 깨어난 순간에 계시처럼 떠오른 이미지로 해석해보자. 이 아기는 과거의 시점에 위치한 아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문지방에 서 있는 새로운 자아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이미지는 과거를 재현하는 것도, 현재에 의해 임의로 구성된 것도 아닌 제 3의 이미지이다. 완결된 삶이 아니라 무한한 미완의 삶을 함축하는 아기 이미지는 기억 주체가 자의식적인 자아의 포장을 벗어나 새로운 자아, 심층적인 자아에 눈을 뜨게 하는 데 자양분이 되는 이미지이다. 기억에서 비로소 떠오른 이러한 제 3의 이미지를 매개로 기억 주체는 “미완의 것을 완결된 것으로, 완결된 것을 미완의 것”으로 보는 시각을 터득한다. 이때 기억은 동경이나 우울과 같은 감정의 차원을 떠나 경험과 배움의 차원, 나아가 정치적 행위의 차원과 접목될 수 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작가는 작업 이전에 쓰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의 편집을 통해 쓰는 시나리오를 의도한다. 따라서 영화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관객마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만들기를 원한다. 작가의 격려에 힙입어 관객은 영화에서 제시된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이리저리 서로 연결시켜보기도 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의미 틀에 맞아 떨어지는 고리들을 찾아 하나 둘 꿰기도 하면서 나름의 주관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어쩌면 그러는 와중에 작가가 우울을 집어넣은 곳에서 희망을 길어 올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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