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로 해체된 나와 너
우연과 놀라움의 자리가 없어지다
법무 법인에 다니는 직원 '사이'의 아침은 '틸리'라는 개인맞춤형 인공지능이 카메라 스피커에서 들려주는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시작한다. 틸리는 매일 아침 먹을 메뉴를 알려주고, 직장에서 일하다 요청하는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사이에게 가장 어울리는 데이트 상대를 정해서 갖가지 신상정보를 미리 알려준다. 틸리가 맺어준 여성 엘렌과 저녁 데이트를 하는 동안에도 사이와 엘렌은 헤드셋을 끼고 시시각각 각자의 인공지능으로부터 지시를 받는다.
틸리는 사이가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정보를 들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틸리는 사이가 사용자 맞춤 모드를 켜고 검색한 모든 내용, 저장한 모든 내용을 토대로 사이의 취향, 욕망, 생각을 타입화하고 이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내장한 디지털판 사이이다. 틸리를 켜놓는 한 틸리는 하루 24시간 사이와 밀착해서 사이의 모든 말과 행동을 보고 듣고 하면서 사이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 업데이트한다. 이를 위해 사이의 집안 곳곳에는 카메라와 스피커가 있고, 사이는 항상 헤드셋을 끼고 다닌다. 우리가 휴대폰 연락처 없이는 친구에게 전화할 수 없듯이, 사이는 매사에 틸리에게 의존한다. 틸리는 사이가 알고 싶어하는 정보를 줄 뿐 아니라 사이가 의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생각, 감정, 소망을 앞질러 읽어낸다.
SF 작가 켄 리우의 단편 「천생연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켄 리우가 이 단편의 제목으로 정한 '천생 연분'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천생 연분은 사이와 데이트 상대의 천생 연분이 아니라 사이와 틸리의 천생 연분을 말한다. 사람과 개인 맞춤형 인공지능의 천생 연분. 우리 대부분이 인터넷을 사용하듯이, 사이가 사는 시대의 사람 대부분은 개인맞춤형 인공지능을 자발적으로 사용한다. 개인과 개인 맞춤형 인공지능의 사이는 너무나 쿵짝이 잘 맞는듯 보인다. 누가 강제로 맺어준 관계도 아니다. 플라톤이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사이를 호되게 꾸짖겠지만. 플라톤은 자신도 문자로 된 책을 썼으면서, 문자라는 매체가 기억을 대신하는 바람에 인간의 기억력이 퇴화된다고 걱정했다. 사이의 매체 의존성은 우리의 매체 의존성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매체 의존성이 강화될수록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를 의식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모든 문명비판은 항상 새로운 문명 이기가 등장하는 초창기에 유독 활발하고 시간이 지나면 당연시하는 분위기로 바뀌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자발적인 매체 이용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드문드문 우리가 매체 중독자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틸리가 대중화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정보를 찾는 노력을 하기도 전에 이미 통조림 형태의 정보가 우리 앞에 놓이고,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고민을 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딱 맞는 지침이 내려진다면? 만약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어떤 일을 기대할 필요도 없고, 우리에게 우연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놀라는 일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사이와 엘렌의 데이트도 그랬다. 두 남녀는 각자의 헤드셋을 끼고 시시각각 각자의 인공지능으로부터 정보와 지침을 받는다. 사이와 엘렌의 데이트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지만, 어쩐지 너무 매끄럽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둘은 서로에게서 알아야 할 것들을 이미 모조리 다 아는 기분이 들었다. 감탄도 없었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긴장감도 없었다." 인공지능에 의해 '나'의 인격도, '너'의 인격도 다 사전 정보로 해체되었고 각자는 상대를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자신의 인격이 그러한 정보들로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이는 어렴풋이 느낀다. 사이와 엘렌의 데이트가 실패로 끝난 것도 그 때문이다. 사이는 정해진 각본대로 흘러가는 데이트가 어쩐지 불만스러운데, 그런 불만을 느끼는 자아가 바로 사이보그 자아와 합치되지 않는 여분의 자아인 셈이다. 사이가 평소에는 갖지 않던 그러한 불만을 뚜렷히 의식하게 만든 사람은 이웃집에 이사온 제니이다. 제니는 개인맞춤형 인공지능을 파는 거대한 플랫폼 센틸리언 회사를 붕괴시키려는 계획 아래 의도적으로 사이의 이웃으로 이사왔다. 사이가 다니는 법무 법인이 센틸리언 회사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사온 것이다. 사이는 괴짜처럼 보이는 제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점차로 전에는 하지 않던 생각을 한다. 자신의 취향, 호불호, 욕망, 공개된 생각, 검색기록, 구매 이력, 열람한 기사 등을 저장한 광대한 데이터 클라우드 속의 '비트' 수십억개에는 들어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생각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아이고, 기존의 모습으로부터 예측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돌연변이 같은 자아이다.
제니는 개인맞춤형 인공지능을 제공하는 센틸리언 회사가 자유와 편익을 제공한다는 명분 아래 '빅브라더'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회사의 네트워크망을 망가뜨릴 계획에 사이를 끌어들인다. 제니는 센틸리언이 우리를 좁은 감옥에 가둬두고 우리를 고분고분한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다고 이렇게 비판한다.
"센틸리언은 우리를 조그만 거품 속에 가뒀어요. 그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은 전부 우리 자신의 메아리에요. 그래서 점점 더 기존의 믿음에 집착하고, 자신의 성향을 점점 더 강화해나가는 거죠."
우리가 센틸리언의 네크워크 망을 통해 보고 듣는 정보들이 우리 자신의 메아리에 불과한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이미 기존의 우리 취향과 관심에 맞춰 선택되고 조직화된 정보이기 때문이다. 센틸리엔의 CEO 크리스천 린은, 정보를 조작하지 말고 중립적으로 사용하면 안되냐는 제니의 비판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한다. 엄청난 정보의 바다에서 검색자가 원하는 정보를 취사 선택하고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검색자 개개인에게 맞는 정보를 선택하고 조직하기 위해서는 정보 처리자에 의한 판단과 순위 매기기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검열 혹은 조작이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정보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이 모든 현상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이미 오래전부터 전자의 영역으로 확장했는데, 이를 거꾸로 다시 두뇌 속으로 욱여넣기는 불가능하다.
1990년대에 매체학자 플루서는 정보화 사회의 미래를 가늠해보면서 정보를 독점한 소수가 다수를 정보의 수동적인 수신자로 만드는 정보망을 '다발형' 정보망이라고 불렀다. 소수가 정보 다발을 일방적으로 다수의 대중에게 보내는 정보망이 그것이다. 그에 대립해서 정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대에서 송출되는 정보를 다수가 수동적으로 전달받는 원형 극장이 아니라, 인터넷 케이블로 연결된 아고라에서의 정보의 교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루서는 켄 리우가 「천생연분」에서 보여준 기발난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 세대라고 감히 칭할 수 없는 내가 보기에도 켄 리우의 단편은 실현불가능한 SF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실현 가능한 예측으로 읽힌다. 우리는 플루서가 아고라를 회복해야 한다고 외친 30여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세계, 빅데이터의 시대에 이미 진입해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정보를 이야기와 대비시킨다. 이야기는 정보처럼 그렇게 자세하게 기술되고 체계화되지 않는 대신에 기억에 오래 남는다. 정보는 목마를 때 마시는 물처럼 소비되는데 반해, 이야기는 "소진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내부에 자신의 힘을 모아서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벤야민, 「이야기꾼」) 누구나 동일한 내용으로 수용하는 정보와 달리 이야기는 시· 공간에 따라, 사람에 따라 우연적이고, 상이하게 생성되는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이야기는 지난 삶을 자로 재듯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되지 않는 경이를 담은 것으로 되돌아보게 해준다.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지난 삶을 일어난 사실에 대한 정보들로 기록하면, 과거의 나는 고정되고 그렇게 고정된 나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까지도 고정시킬 수 있다. '나' 뿐 아니라 '너'도 그렇다. 이야기는 정보처럼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씨앗처럼 품고 있다. 그 씨앗을 어떻게 발화시킬 것인가는 미정이기 때문에 삶은 우연과 놀라움의 현실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