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어교사모임 회지읽기소모임
2023년 10월 25일 오후 4:34 에 회지 읽기 소모임에 올린 글이다.
1.
혐오의 대상이 되는 다양한 소수자를 수업에서 다루려면 텍스트가 필요한데, 교과서를 쓰지 말자고 다른 선생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시수 쪼개기에 도전했습니다. 저는 교사 두 명이 1학년 모든 반에 2시간씩 들어가는 체제를 수용해 준다면 연 4회 지필평가에서 모든 서술형/논술형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하겠으며, 40점 만점의 수행평가 중 30점을 담당하고, 전체 학생의 교과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1,000바이트 이상 채워 놓겠다는 거부하기 힘든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모임의 어떤 선생님이 떠오르네요^^ 참교사의 길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방법밖엔 길이 없는 건가요 정말? 꼭 하고 싶은 수업 있다면 저라도 결국 그렇게 했을 것을 같아 공감되면서도 안타깝고 씁쓸하네요
2.
좋은 사람이 되자. 조벽 교수는 “학생과의 관계가 쌓이면 수업에서 자유로워집니다. 하고 싶은 수업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하는데, 최 선생님은 평소에 학생, 동료 교사, 학부모, 관리자 등과 좋은 관계를 쌓았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지방-사립-남고 의 벽을 뚫고 혐오 수업을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선생님이 배워야 하는 교훈이다.
3.
<재희>를 위한 사전 안내글도 많은 참고가 된다. 10년간 학교 안팎으로 시달린 내공이 드러나는 글이다.
4.
혐오 발언은 개체를 개체로 보지 않고 집단의 특성을 개체에 투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개체들의 집합인 사회의 구조를 볼 줄 아는 시각 즉, 숲을 보기와 개체를 개별로 인정하는 균형적인 시각, 즉 나무를 보기를 골고루 갖추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사회의 구조를 보는 시각은 사회과에서 맡고 있을 테니 국어과는 개별적으로 볼 줄 아는 감수성을 갖추게 하면 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논설문과 문학의 차이가 여기 있고 문학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감수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5.
여성,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장애인 다른 인종 비인간 동물의 삶 등 모든 소외된 것들을 위한 수업이 혹시 학교 내의 ‘소수자’에게 눈을 돌리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반어적으로 읽으면 되긴 하는데, 글의 제목에서 <지방, 사립, 남고에서>를 명시하는 것 또한 반페미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6.
학생들은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의 서술상 특징을 찾고 〈재희〉를 읽은 반응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찾습니다. 베트남 결혼 이주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이문재의 시 〈소 판 돈이 이쯤은 되어야〉를 읽고 상황과 정서와 태도를 찾아내야 합니다.
-> 국어 수업에서 본인의 수업과 교육과정 수업의 수위를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는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국어 수업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윤리과목이 존재하고 사회과목이 존재하는데, 국어 시간에 '문학적 해석 역량'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소재주의로 접근하는 것은 온당한가?
우리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극복이라는 이 수업의 가치에 동의를 하기에 이 글이 감동적인 수업 사례로 읽히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 보자. 80, 90년대에 박정희 독재를 찬양하고 반공 정신을 가르치던 국어 수업 역시, 그 당시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지지를 받았다. 국어 교사가 자신의 가치를 ‘국어’라는 과목으로 포장하여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정말로 온당한가? 독재, 반공은 인류 보편적이지 못하고 반인권적이지만, 혐오와 차별의 극복은 인류 보편적이고 인권적이라 훨씬 높은 가치를 띄고 있으니 괜찮다면, 국어 기능 교육이 먼저인가 가치 교육이 먼저인가의 판단에서 혹시 우리가 내로남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