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잊지 못할 환승역 얼스 코트(Earl's Court)
리치몬드 공원으로 가기 위해선 초록색 디스트릭트 라인으로 갈아타야 했다.
아. 뿔. 싸!
그런데 갈아타는 정거장 얼스 코트(Earl's Court)에서 떠나려는 지하철에 급한 마음으로 몸을 싣고 보니 떠나가는 열차에 나 혼자만 몸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지하철 문은 이미 닫혔고, 엄마와 명숙이, 묘택이 아줌마는 한 손에 커리어 가방을 하나씩 들고 창문 밖 너머에서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져 버린 나는 손짓, 발짓해가며 다음 역으로 와서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영어로 말 통하는 영국에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바디랭귀지가 최고다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엄마와 친구들은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당황한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가 나의 신호를 읽었을까. 다음 정거장까지 도착하는 내내 어떻게 하면 우리의 텔레파시가 통할까 머리를 굴렸다.
가슴이 두근두근되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어질 한가운데, 무도의 <텔레파시 편>이 생각나 웃픈 가운데 웃음이 피식 나오기도 했다. 혹시나 길이 엇갈려 잊어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마음과 몸이 조급해졌다. 머릿속엔 남산 팔각정에서 텔레파시 신호를 보내는 유재석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동시에 그 모습이 내 모습이다라고 자기 암시를 하며 열심히 텔레파시 전파를 쏘려고 노력했다.
내가 다섯 살 때 엄마랑 동네 시장에 갔다가 내가 엄마를 잊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두부를 사기 위해 두부 장사와 얘기를 나눈 사이, 엄마 손을 놓고 시장 앞으로 쭉쭉 걷다가 경찰서에서 찾게 됐다는 이야긴데, 이후로도 엄마는 내게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다섯 살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래서 뚜렷하게 내가 기억하듯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였다. 같은 자리에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계속 움직여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고 말버릇처럼 얘기하던 엄마의 이야기가 순간 생각났고, 엄마와 나의 텔레파시가 통한다면 엄마는 친구들과 제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나는 다음 역에서 내려서 기다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전 역이었던 얼스 코트(Earl's Court)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다. 갈아탈 수 있는 라인이 여러 개라 한 번에 맞는 지하철을 타기가 어려운데 어쩐지 타이밍이 잘 맞아 10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자리엔 다행히 엄마와 친구들이 그대로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군데를 더 많이 보여주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일어난 이번 사건을 통해, 다 구경하지 못해도 좋으니 천천히 여유롭게 엄마와 엄마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자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