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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Jun 07. 2018

여행이란,

발칸, 22일 #1


다소, 아니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여행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를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여행을 그것이 주는 즐거움의 관점에서 2:1:3의 비례식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건 내가 항상 강조하듯 제대로 된 여행이란 준비, 실행 및 정리라는 삼부작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유기적으로 잘 엮이느냐에 따라 그 맛과 기대했던 성과가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삶과도 많이 닮아 있다. 1부에 해당되는 10대와 20대의 열정과 기대, 2부의 30대와 40대의 준비된 실행력, 그리고 3부의 50, 60대의 기억과 추억을 반추해 가며 정리하는 여유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피아 네프스키 성당, 불가리아


물론 그 세 부분의 어디가 가장 중요한 지에 대한 별 의미 없는 질문이라도 만약 받는다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마치 탈무드에 나오는 먼 나라의 공주를 구한 삼 형제들이 가지고 있던 세 가지 보물인 망원경, 양탄자 그리고 사과에 대한 개인의 판단처럼 답하기 어렵고 개인차가 많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점차, 여행 후의 느낌과 기억을 정리해 나가는 쪽에 조금씩 점수를 더 주고 싶어 진다. 물론 중요도의 측면이 아니라 즐거움의 크기와 지속기간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는 나이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으리라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스코페, 마케도니아


여기서 내 나름대로 이 비례식의 의미를 풀이하자면, 2:1:3이란 만약 여행기간이 10일이라면 준비하는 20일과 여행 후의 30일, 총 60일이 여행으로 인한 즐거움에 빠져 지낼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다. 만약 여행기간이 20일이라면 준비기간 40일과 다녀와서의 60일, 총 120일을 즐겁게 지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행기간이 30일을 넘어서면 이 비례식은 2:1:3에서 3:1:6으로 조금 수정이 되어야 한다. 30일을 여행한다면 90일의 준비기간과 정리의 180일 등 총 300일 정도를 여행 때문에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거의 일 년을 30일의 여행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게 나의 계산이다.



티라나, 알바니아


이러한 개인적인 여행에 대한 정의와 해석에 따르면, 금방 눈치채겠지만, 여행은 시간과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필요조건임을 알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여행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다분히 노인들을 위한 정의 쪽으로 경도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조건들이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꼭 그렇다고만 볼 수도 없다(노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할 수 없다는). 그러면 시간이 많은 노인들은 여행을 통해 시간과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한시라도 빨리 배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래서 이러한 뚱딴지같은 여행론에 입각해서 살아가다 보니 난 늘 바쁘다. 정리하고 기억하고 추억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또 다른 시간을 위해 저장한다고.



코토르, 몬테네그로


갑자기 발칸반도 쪽으로 필이 꼽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갑자기'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가 몇 가지 있는 것 같다. 가까이로는 올 초에 다녀온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로의 패키지여행에 대한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약 열흘에 걸친 2개국에 국한된 여행이었기에 속속들이, 알차게 그리고 편안하고 여유로운 일정으로 발칸 서쪽의 일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여행의 준비과정에서 서구 기독교 문화 중심적 세력과 이슬람 세력과의 충돌에서 야기된 전쟁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억울한 죽음들을 어렴풋이 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서구 중심적 승리의 흔적들이었고, 살아서 누리기 위해서는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는 그들 위주의 세계질서였다. 그런 인식들이 여행의 정리 과정에서 소외되고, 부당하게 억압받고 희생된 자들의 역사에 관심이 갔고, 더 알고 싶은 욕구로 이어져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로의 여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한편, 좀 더 멀리로는 약 10년 전에 북유럽을 제외한 중, 서, 동부 유럽은 애들과 이미 갔다 왔고, 이제 남은 유럽의 갈 곳은 발칸반도라고 누군가에게 공언한 바가 그 후부터 괜히 내게 족쇄가 되어왔다. 일종의 외워서는 안 되는 주문을 읊어버린,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듯,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가야만 한다는 주술이나 마법에 걸린 채 지나온 10년이 이제 더는 발칸으로 향한 열정을 억누를 수 있을 만큼의 긴 시간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스타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그 외에도 상대적으로 싼 물가라든가, 소박하고 순박한 사람들(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면보다는 견해가 많이 엇갈리지만), 그리고 아직까지 제대로 접해보지 않은 구 소련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왔던 동구 사회주의 문화의 흔적과 파편들에 대한 호기심 등등이 나를 거기로 이끌었다. 그렇게 이 모든 것들이 오래전부터 품어왔고, 꿈꿔왔던 버킷 리스트들이었지 어느 날 갑자기 발동한 호기심이나 충동은 절대 아니다.

발칸반도로 발걸음을 향하게 만들었던 이 추동력은.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그렇게 해서 발칸으로 마음이 움직였고, 그러다 보니 22일간을 머물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터키를 제외하고 7개국 -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루마니아 - 19개 도시 - 플로브디프, 하스코바, 소피아, 스코페, 오흐리드, 스트루가, 티라나, 코토르, 모스타르, 사라예보, 베오그라드, 티미소아라, 시비우, 브라소프, 브란, 시나이아, 부카레스트, 바르나, 부르가스 - 를 돌게 되었다. 여정을 추적해보면 이스탄불로 입, 출국해서 시계방향으로 발칸반도를 한 바퀴 돈 셈이다.



티미쇼아라, 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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