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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May 24. 2017

Eureka 비문학 읽기 10
"혼자 생각하는 즐거움"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은 발랄하다!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조용한 모습인가, 우렁찬 모습인가? 가만히 있는 모습인가,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인가? 짐짓 심각한 모습인가, 힘 빼고 웃는 모습인가? 과연 생각하는 모습은 꼭 이런 모습들 중에 하나여야 할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 목차 -

1. 생각한다는 것에 대하여

2. 작품 해설 (생각하는 방법에 대하여)

 - 옳고 그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 세상의 모순 이해하기.

 - 원칙을 뒤집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


1. 생각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 책은 철학자이자 문필가인 구시다 마고이치가 44가지 주제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야. 그가 사용한 단어나 표현들, 그의 머릿속 생각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주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만큼은 다른 모든 사람의 생각을 배제하고 자기 나름의 결론을 내렸어. 생각한다는 것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말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괴로운 표정으로 고민하는 미켈란젤로나 로뎅의 조각상을 떠올리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비참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 혹은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고 사방이 콱 막힌 미래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사람’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각하는 기능’의 진정한 역할은 괴로워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약간 거창하게 말하자면 ‘생각하는 기능’은 인간이 보다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한 심사숙고 혹은 그를 위한 노력이어야 합니다.”

“인상을 찌푸리기보다는 생글생글 웃는 사람,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기보다는 자신의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 주의 깊고 신중하면서 당찬 몸놀림으로 망설임 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야말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마땅합니다.”

이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떠올리는 정적인 과정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서 부단히 고민하는 과정이라는 말이야. 보다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는, 생동감 있는 모습이야말로 ‘생각하는 모습’에 알맞다는 거지.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리며 패배감에 젖어있는 자세나 머릿속에 떠도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아무 고민 없이 따르는 자세는 제대로 생각하는 자세라고 볼 수 없다는 거야. 내가, 나아가 우리 사회가 보다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어떤 것을 옳다고 말하고 어떤 것을 그르다고 말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세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생각하는 모습’에 알맞아.


2. 작품 해설(생각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 책은, 소개하는 글을 쓰기가 참 어렵더라. 44가지 주제에 대해 저자가 생각한 걸 무작정 요약해서 실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책과 완전히 상관없는 작품 해설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냈어. 저자가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서 “보다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한 심사숙고(저자가 말하는 생각의 정의야)”를 할 때 어떤 ‘생각의 방법들’을 사용했는지에 주목한 거야.

살다 보면 당연히 우울할 때가 있지만(그리고 그게 나쁜 것도 아니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우울감에 젖어 괴로워하는 것만으로는 생각한다고 말할 수 없어. 생각을 통해서 보다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서 저자는 어떤 방법들을 사용했을까? 나는 44가지 주제에 대해 저자가 생각하는 과정, 그 생각의 흐름을 내 나름대로 분석해봤어. 첫 번째는 ‘옳고 그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두 번째는 ‘세상의 모순 이해하기’라고 내 나름의 제목도 붙였고 그 생각의 흐름대로 내 나름의 생각도 해봤지. 어때, 한 번 들어볼래?


옳고 그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생각을 통해 보다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옳고 그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해.

예를 들어, 의심한다는 것은 옳은 행동일까? 내가 친구를, 선생님이 학생을, 부모님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은 옳은 행동일까? 지나친 의심은 우정이나 사랑, 존경심에 금이 가게 만들어. 하지만, 우리가 모은 돈을 반장이 관리하는데 반장이 그 돈의 사용내역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반장을 의심하는 우리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일까?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면, 정치인이나 언론, 고위공직자들의 부패와 같은 문제를 드러낼 수 없지. 저자는 이렇게 말해. “의심하는 것은 훌륭한 행위로 여겨질 때도 있고 천박한 행위로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룬 긴장된 자세’야말로 우리가 의심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하지 않은, 적당한 긴장인 것 같아. 이 정도면 의심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겠다.

속이는 것은 옳은 행동일까? 속이는 건 나쁘다고 배웠지? 그런데 그것만 배우고 끝난다면, 우리가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을까? 난 학창 시절에 부모님을 참 많이도 속였어. 자습하러 간다고 하고 PC방에 갔고, 숙제를 했다고 하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매를 맞았어. 이게 그렇게 나쁜 행동일까? 왜 하는지도 모르겠는 공부를 초등학생 때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전부터, 잠까지 줄여가며 하는 건 옳은 걸까? 하루에 두세 시간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하는 건 적당한 여가활동이라고 할 수 없을까? 영양가 없는 숙제를 왜 해야 할까? 공부하고 숙제하는 게 너무 질리고 힘들어서 부모님을 한두 번 속일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저자는 이렇게 말해. “속이는 것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속이는 것에는 꼭 악의적인 면만 있지는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을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는 그때 정말로 지치고 힘들었고, 내가 나 자신을 속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부모님을 속인 게 무조건 나쁜 행동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니, 내가 조금은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옳고 그름은 자로 재듯이 정확하게 나눌 수 없어. 하나의 현상도 어느 각도에서, 어떤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야. 한 가지 현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다 보면, 똑같은 행동일지라도 어떤 관점에서는 용인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권장할만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무조건 ‘의심하고 속이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보단 ‘이럴 때는 의심하고 속여서는 안 되지만, 이럴 때는 의심하고 속이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자세야말로 균형 잡힌 자세가 아닐까?     


세상의 모순 이해하기

나는 모순적인 표현들을 좋아해. 알고 보면 세상은 모순투성이거든. 우리가 자주 쓰는 속담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보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속담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 중에 뭐가 맞는 걸까? ‘큰 그릇은 늦게 찬다.’라는 속담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 중에서는? 사람들은 속담에 비유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고는 하는데, 보통 하나의 속담이 있으면 그와 정반대 의미를 가진 속담이 있게 마련이야. 내가 어머니께 심한 소리를 했던 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대로라면 심한 꾸중을 들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사과랑 배를 깎아서 내 방에 가져다주셨어. 이럴 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지? 이상하게 그날 먹은 사과랑 배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더라.

꿈의 모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 책에서는 꿈이라는 단어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해.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라는 뜻과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이라는 뜻이 그 두 가지래. 두 가지 뜻이 참 다르지. 우리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처럼 우직하게 우리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 아니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라는 속담처럼 일찌감치 어려운 꿈을 포기해야 할까? 저자는 이렇게 말해.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칠 수 있는 꿈의 전당은 자신을 포함해 다수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꿈을 꾸더라도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새일지라도 푸른 하늘 위에 둥지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꿈을 꾸되 거기에 지나치게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누군가는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얘기하고 누군가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라고 말할 때, 모순적인 두 의견 사이에서 자신의 정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거지.

나는, 한 사람의 꿈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왠지 부적절해 보여.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꾸짖기 전에 우리는, 틀렸다는 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해.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낮은 꿈을 꾸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일까?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의 꿈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을까?

나한테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던 친구가 있었어. 그렇다면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은 당연할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걸 하나 찾았으니 그 친구의 주장이 틀린 게 될 테고, 당연하지 않다면 그 스스로 자기 말을 부정하는 셈이지. 내 친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야. 그런데, 그 친구의 말이 모순적인 것만큼 이 세상이 모순적이야. 어쩌면 그 자체로 모순을 담고 있는 내 친구의 문장이야말로, 우리 세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속담이 아니었을까?     


원칙을 뒤집고내 나름대로 생각하기

사회에는 원칙이 있어. 혼자서 사는 사람이 있다면 원칙 따위야 자기가 정하기 나름이겠지만,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여러 가지 원칙들에 따라야 해. 그런데 지켜야 하는 원칙들이 내게는 도저히 지킬만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법체계를 보호하기 위해 독배를 마셔야만 할까? 소크라테스는 사망 당시에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 이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독배를 마셨다고 전해지는데, 독배를 엎어버리고 감옥을 탈출하면 안 됐던 걸까? 내가 지켜야 하는 원칙이 내 의견을 쏙 빼놓은 원칙일 때, 과감하게 저항하며 혁명을 시도하면 안 되는 걸까? 지난 2015년 11월,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소홀, 농민문제, 빈곤문제 등에 항의하며 시작된 제1차 민중총궐기에서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 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가 사망에 이르렀어. 우린 정부가 제시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청와대와 국회, 헌법재판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가만히 앉아서 그 결과를 기다려야 했던 걸까?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의 행동이 물대포를 정면으로 맞을 만큼 폭력적인 행동이었던 걸까?

아까 말했듯이 세상은 모순적이야.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데, 장애인에게는, 노인들에게는, 여성에게는, 유색인종에게는, 또 비정규직에게는 법이 평등하게 느껴질까?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 악법도 법이라는 원칙도 절대로 당연한 건 아니야. 지난 2월,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 대표 박경석 씨가 국민연금공단 건물 외벽에 ‘나 박경석,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낙서’를 했어. 이 경우에, 남의 건물에 낙서하면 안 된다는 가치가 장애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가치보다 우선할까? 옳고 그름은 어떤 기준에서 현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뒤집히는 거야. ‘이럴 땐 남의 건물에 낙서하면 안 되지만, 이들의 경우엔 정말 어쩔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자세야말로 정말 균형 잡힌 자세 아닐까? 세상의 모순을 깨닫고 나면, 우리가 배워온 옳고 그름의 잣대가 새롭게 보이게 될 거야.

그렇다고 모든 원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건 절대로 아니야.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고 수정해온 원칙들이니까, 사회에는 쓸모없는 원칙보다야 지켜야 할 원칙들이 훨씬 많지. 원칙에 대해서 얘기를 꺼낸 것은 다만, 무엇이 ‘쓸모없는 원칙’이고 무엇이 ‘지켜야 할 원칙’인지에 대해서 각자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이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동의하지 못하겠는 부분들이 많았어. 구시다 마고이치가 나름의 생각을 가진 만큼, 나도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와 그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거나 밉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가 겪어온 삶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한 주제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다른 게 아닐까? 우리 모두가 가진 나름의 생각들을 어떻게 하나의 생각으로 담아내는 것, 그래서 그 생각 앞에서 모두가 소외당한다고 느끼지 않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생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해.

이 책을 읽으면서 꼭 감동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때로는 반대하고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이 부분에는 수정이 필요하다.’라고도 생각하는 게 건강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아닐까? 지금 내 글에도 얼마든지 반대해도 된다고! 혼자 생각하는 게 즐거운 이유는, 적어도 그 안에서만큼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휩쓸려 내 의견이 소외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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