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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라는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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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Jan 17. 2018

~라는 장애 1

첫 번째 장애 이야기

 이름 붙인다는 것     

 사람들은 예로부터 사물이나 현상에서 공통점을 추려내는 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사물과 현상에 이름을 붙이듯, 그 공통점에도 이름을 붙였다. 따듯함- 불과 햇빛, 여름의 공통점. 아름다움- 꽃과 노을, 미소의 공통점. 어느덧 사람들은 서로에게서도 공통점을 찾아내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다. 부드러움- 당신과 나의 공통점. 귀여움- 그와 그녀의 공통점.

 그러나 누군가는 따듯한 게 아니라 덥다고, 뜨겁다고 할 것이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게 아니라 슬프다고, 어쩌면 두렵다고 할 것이다. 명명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명명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아야 비로소 언어가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는 언어라고 해서, 그것이 항상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언어라고 해도, 언어는 듣는 사람의 기분을 쉬이 나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명명하고 범주화하는 것은 많은 주의가 필요한 일이다. 누군가 꽃을 아름답다 한들 꽃이 기뻐할 리 없고, 누군가 두렵다고 한들 아쉬워할 리 없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람은, 스스로를 명명하고자 하는 존재고 스스로를 범주화하고자 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 어떤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과 하나로 묶이고 싶은지 알고 있다.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장애와 욕망     

 또래에 비해 성장과 발달이 더딘 아이의 부모 중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아이가 장애판정을 받는 것을 거부한다. 장애판정을 받지 않고서는 온갖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음에도 말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그 이유를 자신의 아이가 장애인이라고 불리는 게 싫어서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가 장애인이라는 범주에 속하길 바라지 않는다. 비장애인을 위해 마련된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의 아이가 신체가 불편한 비장애인이라고 불리기를 바란다. 

 신체가 불편한 게 바로 장애인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체가 불편한 사람과 장애인이라는 언어가 의미하는 바는 다르다. 장애라는 언어는 사람의 목적의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바랄 때 그것을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가 장애다. 바람이 있어야 장애도 있다. 신체가 불편하지만 원하는 걸 스스로 해내는 사람에게 장애인이라는 언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장애라고 부르는 것 중에 많은 것을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장애라고 부르지 않는 것 중에 많은 것을 장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아무렇지 않게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다. 걷는 게 당신에게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휠체어를 타는 삶에 만족하는 사람에게 걷지 못하는 건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또 나는 자신이 비장애인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다. 장애는 간절한 바람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건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이 있는 사람에겐 장애가 있고, 좌절된 꿈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겐 장애의 추억이 있다.     

욕망 없이 장애를 설명할 수는 없다


 장애해방의 방법

 장애라는 언어는 멈춰 있지 않다. 그건 바람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간다. 바람이 머물 때 나는 장애인이 된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면 비장애인이 된다. 하지만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장애해방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사람은 바람을 다룰 수 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람을 미리 예측하고 피해 다닐 수 있다. 바람 부는 곳에 굳이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고, 벽이나 집을 세워 바람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바람의 특성을 이용할 수도 있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바람을 즐기듯이 장애를 긍정할 수도 있다.

 바람이 불면 어떻게든 그걸 극복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을 수 없는 장애가 언제쯤 다 낫느냐고, 언제 이 사람이 정상인이 될 수 있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장애당사자도 아닌 다른 사람이, 장애는 꼭 열심히 치료받아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폭력적이다. 바람에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면 나중에는 강한 바람도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태풍까지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가끔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바람이 머물 때 나는 장애인이 된다. 그리고 바람이 잦아들면 비장애인이 된다. 하지만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장애해방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라는 장애

 가끔씩 우리가 사는 사회가 태풍처럼 느껴지는 날이 있다. ‘-라는 장애’라는 제목으로, 그런 날들의 일기를 쓰겠다. 장애라고 부르지 않던 것을 장애라고 부르면, 장애인이라 불리던 사람이 장애인이라 불리지 않아도 된다. 장애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에 있는 것이기에…….

 ‘왜 어떤 아이는 학교에 눈치 보며 다녀야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고속‧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없는가?’와 같은, 장애인권문제에서의 사회적 맥락은 다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문제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같은 일을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급여가 낮은가?’, ‘왜 어떤 연인은 결혼할 수 없는가?’, ‘왜 어떤 성별은 취업과 승진에 불리한가?’, ‘왜 어떤 취미는 존중받지 못하나?’ 수많은 질문에서 “그게 정상이냐? 비정상이지!”, “네까짓 게 감히?”, “네 노력이 부족한 거 아니야?”라는 대답이 반복된다. 나는 이런 대답이 얼마나 가혹한지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름을 붙이는 것에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언어로, 누군가를 강제로 보호하고 있진 않은가? 누군가를 언제나 보호받아야 하는 약자로 만들어, 그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못하게 만들고 있진 않은가?

자신이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는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다. 장애라는 언어는 멈춰 있지 않다. 그건 바람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간다.

자신이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는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다. 장애라는 언어는 멈춰 있지 않다. 그건 바람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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