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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Jun 05. 2018

우리 사회의 '만들어진 악마들'

악마를 만드는 부양의무제

커버 사진은 관련 기사(http://beminor.com/detail.php?number=12258)에 실린 사진을 가공 없이 사용했습니다.
본문에 포함된 요약 기사도, 위 링크 속 비마이너 기사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1. 기사 내용 요약

구동회씨는 시설에서 약 40년을 살았다. 2년 전 시설에서 나와 체험홈에 살다가, 이제 혼자 살기 위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거절 당했다. 구씨에게 상속 포기 재산 6천만원이 있었기 때문.

사정은 이러했다. 구씨가 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구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구씨의 몫으로 6천만원이 상속됐는데, 구씨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들이 구씨의 상속을 포기해 버렸던 것. 가족들은 구씨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숨긴 채 아버지 땅을 팔기 위해 구씨의 인감증명이 필요하다는 거짓말을 한 뒤 그 인감증명을 상속 포기에 이용했다.

상속포기 재산은 실제로 구씨의 수중에 들어온 돈이 아니지만, 약 7년 간 구씨는 그것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다. 구씨는 현재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장애인 부양의무제효과는 사라지고 역효과만 남은 제도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작 장애인의 가족은 장애인을 가족으로도, 심지어 한명의 동등한 권리주체로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2. 악마를 만드는 제도, 장애인 부양의무제


이런 문제를 그저 개인의 일탈로 바라 보면, 이런 문제가 단지 장애인을 둘러싼 사람들의 결여된 도덕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면, 해결은 어렵지 않다. 일탈 행동에 확실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이후에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확실히 처벌할 수 있도록 기존 제도를 정비하면 그만이니까. 부양의무제 따위의 기존 제도를 뿌리 뽑고 새로운 제도를 추진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이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도 괜찮을까? 왜 장애인의 가족은, 그들의 가족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까? 이건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는 뛰어난 사람이 잘 사는 게 당연한 사회다. 자본주의 사회는 뛰어나지 않은 사람은 잘 살 수 없는 사회이자, 나아가 노인이나 장애인처럼 노동시장에서 배제당한 사람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다. 이처럼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복지국가다.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평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이념을 포기하는 대신, 국민들로부터 공적 기금을 마련해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거나 차별 받는 사람을 돕는 방법을 선택한 사회다. 따라서 복지국가의 복지제도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하지만 잘못 설계된 복지제도는 겉으로는 차별 받는 사람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차별 받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무디게 만듦으로써 차별이 지속되는 데 기여한다. 어떻게?


부양의무제를 예로 들자. 부양의무제는 부양의무를 지닌 자(주로 가족)가 없는 장애인에게 그렇지 않은 장애인 보다 더 나은 제도적 지원을 약속한다. 언뜻 보면 이는 당연한 처사다. 가족이 있는 장애인 보다는 가족이 없는 장애인이 훨씬 불행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제도가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은 우리의 직관을 따르지 않는다.


관점을 조금 달리 해 부양의무제를 바라보면, 그것은 부양의무를 지닌 자가 존재할 때는 정부가 장애인을 부양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제도다. 부양의무제 도입으로 정부에서 제공하는 복지의 총량은 증가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감소된다. 부양의무를 지닌 자가 없는 사람에겐 복지가 그대로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복지 대상에서 배제될 테니.


부양의무제는 정부의 복지 부담을 부양의무자에게 떠넘기는 제도다. 하지만 정부의 도움 없이 장애인을 부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그것은 본인의 삶을 위협할 만큼 힘든 일이다. 장애인 가족의 일탈은 대부분 여기서 비롯된다. 만약 부양의무를 지닌 자가 자신에게 부과된 부양의무를 유기한다면, 장애인 당사자는 정부의 지원도 못받을 뿐더러 부양의무자의 지원도 못받는 상황에 처한다. 부양의무제의 명백한 허점이다.


부양의무제는 장애인을 부양의무자가 있는 사부양의무자가 없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눈다. 그중에서 부양의무자가 있는 사람 부양의무자는 있지만 부양 받지 못하는 사 부양의무자가 있어서 부양 받는 사으로 또 다시 나뉜다.


이 중에서, 부양의무자가 없는 사은 제도의 지원을 받기에 부양의무제의 문제를 알아채기 어렵고, 부양의무자가 있어서 부양 받는 사람은 제도적 지원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이 부양의무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기에 부양의무제의 문제를 알아채기 어렵다.


한편, 부양의무자는 있지만 부양 받지 못하는 사은 부양의무제의 문제를 비교적 쉽게 깨닫지만, 주변 사람들 중에 자신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잘못 설계된 제도에 의해 이미 대중이 분열되고 무뎌진 다음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부양의무제는 부양의무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옅어지게 만듦으로써 차별이 지속되는 데 기여한다.


부양의무제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로 바라본다.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는 악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악한 사람이 조금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고, 만약 어떤 사람이 악하게 행동한다면 처벌하면 된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처벌이 두려울 테니 악하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식의 관점.


그러나 세상에는 선량한 사람만큼 추악한 사람도 많고, 어쩌면 그 수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부양의무제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한 것 아닐까? 부양의무자를 애초에 고려하지 말고 복지제도를 설계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상에 선한 사람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선악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지 금전적인 문제(등의 외부적 요인) 때문에 악을 행하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사람들이 악을 행하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부양의무제 대신 국가책임제가 존재했다면, 이 가족이 일탈 했을까? 행여 일탈 행동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장애인의 삶이 이처럼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문제들을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고, 개인의 일탈 행동을 벌하는 것으로 국가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양의무자에게 국가의 부양의무를 떠넘기기 위한 부양의무제를 당장 폐지하고, 장애인 국가책임제 시대로 이행해야 한다.


국가책임제 이야기를 하면 치매와 발달장애만 언급된다. 치매 걸린 사람과 발달장애인만 국가가 책임질 게 아니다. 모든 장애인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장애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장애도 계속해서 등장한다. '어떤 장애'라는 분류 안에 장애인을 집어 넣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식의 행정(장애등급제)은 이제 끝내야 한다. 장애 양상은 개인 마다 상이하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다고 찾아 온 모든 사람을 개별적으로 평가하고, 개별적인 평가에 알맞은 복지제도를 국가가 고민해야 한다. 국가기관이 직접 하기 힘든 일이라면, 관련 전문가를 고용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게 진정한 국가책임제고,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가 진정한 복지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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