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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Sep 22. 2018

Eureka 비문학읽기13 "체 게바라와 여행하는 법"

소수자가 된다는 것

위대한 혁명가의 삶을 살았던 체 게바라. 그와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가난으로 학업을 포기하게 된 xx세 민영이와 국적을 알기 어려운 이주노동자 최(체)씨 아저씨의 좌충우돌 여행(?)이야기에서 ‘소수자의 철학’을 배워보자. ‘난 데 없이 철학이라니!’ 하며 짐짓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팝콘을 먹으면서 영화를 볼 때의 기분으로 민영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뿐이니까. 소수자 철학의 처음이자 끝은 바로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것’이다!

- 목차 -

1. 배경읽기_ 체 게바라, 너는 누구냐?

2. 작품 해설_ 소수자가 된다는 것


Eureka <배경읽기>


    체 게바라, 너는 누구냐?

    체 게바라가 누군지 아는 사람도 많겠지만 아마 모르는 사람도 많을 거야. ‘체 게바라 평전’이라는 유명한 책도 있다는데 그 책은 나도 아직 안 읽어봤어. 우리 같이 모르는 사람끼리 공부하는 기분으로 체 게바라가 도대체 누군지, 인터넷을 검색해보자! 나는 다음과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을 찾아봤어. 짧은 소설책 한 권 읽는데, 이정도 노력이면 충분하지 뭐!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래. 그는 1928년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독재정권 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과테말라에서 의사 일을 시작했다고 해. 겉으로는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지만 극심한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남미 사람들의 모습에 분노한 체 게바라는 의사를 그만두고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해.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을 일으킨 체 게바라는, 혁명이 성공하며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쿠바에서 시민권을 부여받아 쿠바인이 되었으며 새로운 정부의 수뇌부에 발탁되어 ‘카스트로의 두뇌’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해.

    하지만 점차 독재자가 되어가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실망한 체 게바라는 1965년 돌연 자취를 감추고 볼리비아로 투쟁 무대를 옮겨. 그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던 체 게바라는 결국, 1967년에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해.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하찮아 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체 게바라의 시체를 언론에 공개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체 게바라의 모습이 예수의 모습에 비견되며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게 됐다고 하네.

    체 게바라는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큰 영향을 받았어. 사회주의 이념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고 자본주의가 득세한 뒤에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비판하면서 등장했지. 사회주의는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자본주의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부분적으로나마 국가가 경제에 개입해야함을 주장해. 우리나라, 심지어 미국조차 완전한 자본주의 국가로 보기 힘들어. 최저임금제도와 다양한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물가 상승폭을 조절하는 등의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지. 박근혜 정권이 내걸었던 기초노령연금 및 반값등록금 공약도 대표적인 사회주의 공약이라고 볼 수 있어. 말뿐인 약속이기는 했지만 말이야.

    체 게바라의 시대는 자본에 충실했던 미국이 너무 강대한 나라가 되면서 평등을 추구하던 사회주의자의 목소리가 탄압받던 시대야. 그래서 최근에 들어서야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말하며 평등을 추구하던 사회주의 이념이 옳았음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지. 요즘 사람들은 경제력이 뛰어난 강대국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복지국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잖아?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입김은 세고 사회주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소수야. 그래서 저자는 소수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에 체 게바라를 초청한 게 아닐까?


Eureka <작품해설>


    소수자가 된다는 것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는 따돌림을 당해 본적이 있어.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해 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인데, 안 좋은 기억이어서 그런지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건 없어. 그날의 교실은 유독 어두웠어. 나는 쥐구멍에 숨으려는 겁먹은 고양이처럼, 펼쳐서 세워놓은 교과서 뒤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어. 나를 빼고 웃어대는 친구들의 웃음이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지. 그때 나를 괴롭히던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흐릿하게 기억나. 어느 날 옷을 갈아입다가 내 몸에 남아있는 멍 자국을 엄마한테 들키면서 왕따를 벗어났어.

    그런데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는 기억은 결코 내가 따돌림 당하던 시절의 기억이 아니야. 나는 따돌림 당하는 친구를 같이 놀렸던 적이 여러 번 있는데, 그때의 기억은 어떤 방법으로도 잊히지 않아. 선천적인 장애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아이를 하굣길에 괴롭힌 일, 코를 파다 걸렸다는 이유로 또래 남자아이들한테 놀림 받던 여자아이를 몇 날 며칠 놀렸던 일, 장애는 없지만 눈빛이 이상하고 말투가 이상하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던 아이를 같이 따돌린 일, 취미가 독특하거나 대화할 때 눈을 잘 못 마주치거나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친구가 없는 아이들을 내심 무시한 일처럼 말이야. 나는 내 행동이 그 아이들의 기분을 얼마나 상하게 할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몰랐던 거야.

    저자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해. 여기서의 사랑은 단지 연인들 사이의 사랑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인류애, 동물이나 물건과의 교감, 이념이나 평화에 대한 열망, 세상에 대한 염원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사랑을 말하는 거야. 자신의 고정된 위치를 버리고 경계를 넘어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진정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사랑의 경지라는 거지.

    먼저, 나처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민영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이어서,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이주민, 노숙인, 여성, 장애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자.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이 아주 조금이나마, 사랑으로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이주민이 된다는 것

    민영이가 최씨 아저씨를 처음 만난 건 플라스틱 공장에서야. 외국인 노동자인 최씨 아저씨가 공장 사람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는 것을 지켜보다가 얼떨결에 아저씨를 데리고 공장에서 도망치면서, 둘의 좌충우돌 여행 이야기가 시작돼. 맞는 모습이 불쌍해 보여 데리고 도망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민영이에게 외국인이란 왠지 낯선 존재야. 분명히 한국 사람처럼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데도 무언가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다보니 ‘이 사람이 맞을만한 행동을 했으니까 맞고 있던 건 아닐까’하며 걱정하게 돼. 민영이는 외국인 노동자가 무분별하게 유입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자리나 거주지를 빼앗게 될 거라 생각해. 그런데 과연 그럴까?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유입되면 한 사람분의 일자리와 거주지가 추가로 필요한 건 사실이야. 그런데 그들이 그 일자리와 거주지를 공짜로 얻을까?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시하는 일을,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도맡아 하고 있어.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들도 사회의 몫을 차지하는 만큼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야.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사람들의 몫이 줄어든다는 생각대로라면, 과연 출산도 사회에 독이 되는 일일까? 또 이런 계산적인 생각은 제쳐두더라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행동이 옳은 일일까?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 사람들과 조금 나누어 쓰면 안 될까? 민영이의 생각대로라면 ‘지구촌 시대’, ‘세계화 시대’라는 말이 너무나 무색하게 들려.     


    노숙인이 된다는 것

    민영이와 최씨 아저씨는 대전역에서 노숙하는 노숙인들을 만나. 며칠 동안 씻지 않아 꾀죄죄한 모습, 온 사방이 제 안방인 듯 아무데서나 잠드는 모습이 비루해 보여. 민영이는 속으로 ‘나는 커서 절대로 노숙인이 되지는 말아야겠다.’라고 다짐하면서, 무서운 공장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땡전 한 푼 없이 돌아다니느라 며칠간 씻지도 못하고 옷도 못 갈아입은 자신의 모습이 행여 노숙인 같아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해. 대전역 노숙인 대표 격인 용계 아저씨와 금세 친해져 웃고 떠드는 최씨 아저씨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지. 그런데 과연 노숙인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있을까?

    현대 사회는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사회야.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의 손에 자라다가 결국 돈이 모자라 고등학교를 중퇴한 민영이가 강남에 있는 학원에 다니면서 최고의 강사에게 과외를 받는 아이들보다, 아니면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보다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까? 개천에서 용 나는 건 어쩌다 가끔 있는 이야기야. 만약 민영이가 후에 노숙인이 된다면, 그게 과연 민영이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세상에는 분명히 ‘노오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어. 보통 그런 벽들은 우연한 계기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부모님의 때 이른 사망이라든가, CD가 개발되고 테이프 산업이 망해버렸듯이 세상의 변화로 갑작스러운 부도·파산에 직면한다든가, 가족 중 한 명이 병원비가 많이 드는 병에 걸린다든가, 아니면 아무리 공부해도 가망이 없을 만큼 공부와는 맞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분명히 누군가에겐 유리하고 누군가에겐 불리해. 그 격차를 해소하기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불공정한 경쟁의 피해자를 함부로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완전히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지금 당장은 이룰 수 없는 꿈이야. 하지만 최소한, ‘노오력’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의 일부를 허무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여성이 된다는 것

    민영이와 최씨 아저씨는 옥천에서 ‘옥천감자수제비북클럽’이라는 엉뚱한 이름의 독서 모임 회원들을 만나. 대장암 진단을 받고 망연자실해 있던 감자수제비식당 주인 왕할매, 갱년기 우울증에 시달리던 과수원집 안주인, 치매에 걸린 노모 간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서점주인, 장애아를 낳아서 키우는 짱아 엄마, 남편을 일찍 여읜 뒤 홀로 세월을 보내던 귤 엄마까지 우울한 여자 다섯이 모여 만들었다는 북클럽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여자로서 살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상처받은 영혼들의 연합체라고 해. 민영이는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     ‘글쎄, 여자로 태어나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여자로서 사는 게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지? 당연한 일을 가지고 왜 우울하다는 거야?’ 그런데 과연 여자로 태어났으면 ‘여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한 걸까?

    유교 문화와 가부장 문화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특성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별에 따라 주어지는 고정된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자는 울면 안 된다.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 남자는 외조(바깥일)를 잘해야 하고 여자는 내조(집안일)를 잘해야 한다. 남자는 한 집안의 가장이다. 힘쓰는 일은 남자가 해야 한다. 여자는 밤늦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 따위의 성차별적인 발언들이 아직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가.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오고가는 그 말들이 형체 없는 압력이 되어 우리의 행동을 속박하지. ‘치고받고 싸우는 여자아이들, 힘이 센 여학생, 밥 못하는 아저씨’라는 표현이 ‘치고받고 싸우는 남자아이들, 힘이 센 남학생, 밥 못하는 아주머니’라는 표현보다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그 어색한 느낌의 크기가 바로 성차별의 크기라고 할 수 있어.

    민영이는 400cc짜리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서점주인 아주머니가 10년 넘게 치매 노모를 모신 효녀라는 말에 적잖이 놀라. 그런데 왜? 사실 ‘커다란 오토바이를 모는 아주머니는 효녀가 될 수 없다’라는 법칙 같은 건 없는데 말이야. 만약 우리 주변에 이상하게 느껴지는 게 있다면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따져 물어야해. 그리고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는 이상하게 생각하기를 멈춰야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를 머릿속의 고정관념에서 찾아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     


    장애인이 된다는 것

    민영이는 속리산 끝자락에 있는 금마봉에서 ‘발가락으로 밥을 먹는 아이’를 만나. 자신을 ‘매미’라고 소개하는 그 아이가 발가락으로 밥을 먹는 이유는, ‘테트라 아멜리아 증후군’ 때문이야. 매미는 태어날 때부터 온 몸이 머리, 가슴, 배, 짧은 다리 한 쌍으로 이루어진 아이지. 민영이는 ‘다리 본연의 의무’인 걷는 것만 빼고 무엇이든지 다리로 척척 해내는 매미의 모습을 왠지 못마땅하게 여겨. 발로 밥을 먹거나 악수를 하거나 세수를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과연 손이 하는 일들을 발로 하면 안 되는 걸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장애를 한두 가지쯤 다 가지고 있어. 스스로 남보다 키가 작다고, 얼굴이 못생겼다고, 공부를 못한다고, 말주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이 무엇이든, 세상은 완벽하게 ‘정상’인 사람들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고 ‘정상’의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람을 찾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 세상에 오른손잡이가 더 많다고 해서 왼손잡이가 비정상이 아닌 것처럼, 발로 밥을 먹는 사람도 비정상이 아니야.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장애라는 표현은 신체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야. ‘무언가 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못하는 상태’가 장애라는 표현에 더 알맞아. 매미는 발로 밥을 먹을 수 있고 악수를 할 수도 있고 세수를 할 수도 있지. 매미는 밥을 먹고 악수를 하고 세수를 하는 점에 있어서 장애가 없는 거야. 민영이는 사회·경제적인 이유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지. 민영이는 학교를 다니는 점에 있어서 장애가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장애의 원인은 민영이의 신체에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있어. 매미가 꼭 자전거를 타거나 공기놀이를 해야 할까? 매미가 발만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매미를 장애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간동안 이주민, 노숙인, 여성, 장애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봤어.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게 지금 당장은 익숙하지 않을 지도 몰라. 하지만 온갖 종류의 소수자들이 한 데 뭉쳐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소수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될 거야. 이것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전까지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걸. 세상이 공평해질 때까지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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