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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Jan 09. 2020

Eureka 비문학읽기 16 "슬픈 열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


조금 불편해도 예쁜 옷을 입겠다고 말하는 사람,
침대가 없으면 잠을 자기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
예쁘고 맛있게 요리된 음식이 아니면 먹기 싫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

이 책은 입을 옷을 줘도 성기 가리개로만 착용하는 사람,
침대를 줘도 흙바닥에서 자는 사람,
곤충과 애벌레를 산 채로 먹는,  
그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문명화된 사회는 과연 최고의 사회일까?


Context

용어정리_ 구조주의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

작품해설_ 다른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① 문명화된 사회의 겉과 속

 원주민 사회의 겉과 속

 진보라는 허상


용어정리_ 구조주의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 C. 1908~2009)

프랑스의 문화 인류학자, 민족학자로 현대 문화인류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938년에 브라질 정부의 후원을 받아 브라질 내륙지방 원주민 부족을 조사했고 이를 토대로 1955년 브라질 원주민 부족의 삶을 담아낸 《슬픈 열대》를 출판,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책에서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라고 불리는 문화 해석의 관점을 제시한다.


구조주의

무질서한 현상의 이면에 일정한 질서와 규칙적 패턴을 이루는 구조가 있다는 관점. 구조주의에 따르면 문화는 인간의 정신구조에서 비롯된다. 레비 스트로스는 모든 문화의 기본 구조는 서로 비슷하며, 각 문화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면 인간의 사고에 담긴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통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어떤 구조주의자가 어디까지가 친족이고 어디부터가 남인지를 나누는 근거를 ‘유전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과의 성관계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면, 문화권 마다 결혼 방식(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등) 친족의 구성 방식(예를 들어, 몇 촌 까지를 친족의 범위에 포함시킬 것인가. 남성을 중심으로 친족을 따질 것인가 여성을 중심으로 따질 것인가) 등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근친상간 회피라는 기본구조는 한결같다.

한편, 레비 스트로스의 이론은 검증할 수 없고 역사의 진행과정(진보)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비판도 받는다.     


인류학

전 세계, 전 시대의 인간에 관한 모든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역사시대(특히 근대와 현대)의 사회문화현상을 기록된 문헌자료와 현지조사연구 자료를 통해 비교, 분석하고 서술하는 학문민족학이라고 하거나 좁은 의미에서 문화인류학이라고 말한다.

《슬픈 열대》에서는 민족학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구조주의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

레비 스트로스는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지만 그 모든 문화의 기본 구조가 근본적으로 같다고 설명한다. 《슬픈 열대》는 그런 관점에서 집필한 책이기 때문에, 서로 확연히 달라 보이는 브라질 내륙지방 원주민 부족의 문화와 동양문명의 문화 그리고 서양문명의 문화 모두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공통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바로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문화를 이루는 ‘기본 구조’다.     


짧게 보기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 3부까지는 작가가 브라질로 여행을 떠나게 된 과정을 서술한다. 4부에서 8부까지는 브라질에서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카와이브족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 9부에서는 여행을 끝내고 아시아의 파키스탄, 콜카타, 미얀마 등지를 들른 뒤 유럽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책에서 자신이 나고 자란 ‘서양 문명사회’와 남아메리카의 ‘원시사회’, 그리고 ‘동양 문명사회’라는 이질적인 세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공통점을 탐구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를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원주민 문화도 문명화된 사회의 문화에 견주어 손색이 없음을 설명한다. 이는 원주민의 문화를 파괴한 서양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작품해설_ 다른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문명화된 사회의 겉과 속


도시의 야경 하면 불빛이 꺼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늦은 시간에도 도로 위의 자동차 조명, 가로등 불빛과 네온사인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는 칠흑같이 어둡고 두려운 밤을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던가! 천지창조 이래로 어둠과 싸워 이만큼이나 위대한 승리를 거둔 종족은 없다. 하지만 문명사회의 찬란한 밤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도시의 밤이 이렇게 밝지 않았다. 달이 밝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데 모든 낮을 바치고 해가 진 뒤에야 놀러 나온 사람. 밤은 낮을 잃어버린 사람의 시간이다. 문명사회의 과학·기술은 인간에게서 한낮의 태양을 빼앗아 성장하고 발전했다. 누군가에게는 이 밤이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이 밤이 모두에게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공부하고 일하느라 해를 볼 수 없는 사람에게 밤은 피난처일 뿐이고, 해가 지고도 일하는 사람에게 밤은 피곤하게 느껴질 뿐.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회라는 표현은 주로 나쁜 의미로, 발전되고 문명화된 사회라는 표현은 주로 좋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문명화된 사회에는 긍정적인 요소만큼 부정적인 요소도 있으며, 원시사회에도 부정적인 요소만큼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 따라서 《슬픈 열대》의 저자인 레비 스트로스는 찬란한 서양 문명을 크게 부정하지도, 크게 긍정하지도 않는 태도를 취한다. 원시사회와 문명화된 사회는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다른 해결방법을 택했을 뿐, 둘 중의 어느 한쪽이 크게 낫거나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문명화된 사회를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지만, 서양문명의 한 가지 잘못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한다. 서양인들이 그들 자신의 문화 원주민 사회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 원주민의 문화를 파괴한 오만하고 잔인한 행위가 그것이다. 원시사회가 서양문명에 의해 파괴되고 오염되어 원시사회로의 여행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을 탄식하며, 레비 스트로스는 제 4장 <힘의 탐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이여, 꿈같은 약속이 가득히 든 마법의 상자여, 그대는 이제부터 그대의 보배를 있는 그대로 내주지 못하리라. (…) 한 문명에 의해 깨뜨려진 바다의 정적은 앞으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열대의 향기와 생명의 신선함은 이상한 악취의 발산으로 부패해가고.”     


원주민을 약탈하고 죽이고 노예로 부리면서 원시사회를 파괴한 뒤 그 행위를 ‘야만적인 사회를 문명화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서양문명의 행동이야말로 야만적인 게 아닐까?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사회를 잔인하게 파괴한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은 까맣게 잊고 그 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사진과 모험담을 늘어놓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계문명이라는 덫에 걸려든 불쌍한 노획물인 아마존 삼림 속의 야만인들이여, 부드러우면서 무력한 희생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라지게 한 운명을 이해하는 것까지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탐욕스런 대중 앞에서 사라진 그대들의 모습을 대신하는 총천연색 사진첩을 자랑스레 흔들어대는 요술, 당신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요술을 부리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원주민 사회의 겉과 속


지금까지 소위 ‘문명화된 사회’의 야만성을 살펴봤다. 많은 사람이 바로 이 시점에 가장 자연적이고 원시적인 사회야말로 최선의 사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이 생각에도 반기를 들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문명화된 사회가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원시사회도 완벽하지 않다고 말한다. 레비 스트로스의 이런 생각은 제 38장 <럼주 한잔>에 나오는 다음 문장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완전한 사회란 없다. 각 사회는 그것이 주장하는 규범들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불순물을 그 자체 내에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 어떤 적은 수의 사회를 비교하면 서로서로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게 되지만, 조사의 영역이 확대되어 나감에 따라서 이 차이점들은 점점 감소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어떤 인간사회도 철저하게 선하지는 않다는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사회나 근본적으로 악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회들도 우리와 동일한 원죄를 공유하고 있다. (…) 이에 관해서 단 한 가지 예, 즉 아메리카 문화의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텍족의 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피와 고문에 대한 그들의 광적인 집착은 그들만의 것이 아닌 전 인류의 보편적인 특성이기는 하지만 (…) 우리들이 다른 점에서 그럴 수도 있듯이 그들은 그 점에서 정도를 지나친 것만은 사실이다.”


이 책의 4부에서 8부에 이르는, 브라질 원주민 부족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카와이브족’의 이야기를 보면, 원시사회를 미개한 사회라고 할 수도 없지만 완벽한 사회라고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원시사회의 문화 중에는 사람을 계급에 따라 나누고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 문화나 여자를 도구나 재산으로 여기는 문화, 이따금씩 이유 없는 살인을 일삼고  주술을 통해 그것을 정당화하는 문화 등 우리의 문화에서는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레비 스트로스는, 어느 원시사회의 식인 풍습을 예로 들며 우리가 그들을 함부로 야만적이라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그들은 어떤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중화시키거나 그 힘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그들을 자신의 육체 속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식인행위를 한다. 우리 사회가 범죄자를 구속·감금·추방함으로써 사회에서 축출 또는 배제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이 원시사회에서는 그 정반대의 풍습을 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와는 대칭적인 관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간주하듯이 우리들 자신도 그들에게는 야만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잔인하게 보이는 사회들도 다른 관점에서 검토할 때는 인간적이며, 자애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브라질 원주민 부족을 살펴보자. 척박한 환경에서 사는 남비콰라족은 거의 항상(특히 건기에는) 소꿉장난 같은 극소량의 식사를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웃음과 애정이 끊이지 않는다. 매일 저녁이면 모든 부족민이 불 주위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오락을 즐긴다. ‘타민디제 몬다제(사랑하는 것은 즐겁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남비콰라족은 남녀노소 모두가 성적인 것과 사랑에 개방적이어서, 때로는 성행위를 모닥불 곁에서 하기도 한다. 보통은 100여 미터 떨어진 근처 숲 속으로 짝을 지어 사라져 성행위를 하지만, 이들은 부족의 다른 사람들에게 즉시 발각되어 농담거리가 된다.


한편 남비콰라족은 애완용 동물이 식사에도 참가하며 사람과 똑같은 관심이나 애정을 누린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기에 어떤 동물도 푸짐하게 얻어먹지는 못하지만, 식량이 모자라는 시기라도 동물 몫은 반드시 나눈다. 그 대가로 동물들은 남비콰라족의 심심풀이와 기분전환의 대상이 돼준다. 그들은 개 이외의 동물은 애완을 목적으로 기르고 애완동물 먹지 않는다. 따라서 달걀도 먹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원시사회가 미개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처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원시사회를 살펴보면 문명화된 사회와 아주 비슷한 면도 있다. 어떤 문화는 심지어 우리 사회보다도 더 개방적이고 진보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진보라는 허상


지금까지 쉽게 써내려 왔지만 사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이 책에는 구조주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지질학, 변증법 같은 어려운 단어가 수도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레비 스트로스의 세계관을 최대한 쉽게, 조금이나마 살펴보겠다.


사르트르는 세상에 나타날 때부터 사람이 부여한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물건과는 달리, 사람은 아무런 목적을 가지지 않고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람의 목적은 스스로 어떤 삶을 원하는가에 달려 있기에,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살기를 강조했다. 한편 마르크스는 사르트르의 주장에 따라 눈앞의 삶, 눈앞의 세상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가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에게서는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기존에 주어진 사회에 주체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가 진보하리라는 것.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세계관은 이런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구조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보수적인 사회건 진보적인 사회건, 문화를 구성하는 기본 구조는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보수적인 사회나 진보적인 사회나 사실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이 문제에 대해 한 가지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는 다른 사회의 어떤 요소를 이용해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변화하기 전의 사회나 변화된 사회나 ‘거기서 거기’일 뿐이지만, 사회는 언제든지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하나의 특정한 사회로부터 추출한 요소에 집착하지 않고, 여러 요소를 이용함으로써 우리들 자신의 관습을 개량하는 데 응용될 수 있는 사회생활의 원리를 구별해낸다.”

     

작가는 ‘우리의 사회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하는 유일한 사회’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우리 사회가 변화하지 않고 머물러있는 다른 사회보다 우월하다’라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글_ 이준기 유레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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