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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류 Jan 31. 2020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유레카 비문학 읽기 19 "인간, 신의 권능에 도전하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이 이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의 욕망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현대 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단백질로 이루어진 컴퓨터나 다름없고 자유의지는 허구다. 인간보다 똑똑한 인공지능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보다 뛰어난 인공지능을 눈앞에 두고, 무엇을 근거로 인간이 컴퓨터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했듯, 컴퓨터는 자신이 인간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하지 않을까?

현대 과학으로 새로운 신을 만들어내면 우리가 신을 지배할까, 신이 우리를 지배할까?



Context


배경 읽기_ 인간신의 권능에 도전하다

 * 유발 하라리 

 ① 근대인본주의의 등장

 ② 인본주의세계를 정복하다

 ③ 호모 데우스를 창조하라!



작품 해설_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다

 ① 인간 중심 종교인본주의

 ② 근대성은 과학과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이다

 ③ 무엇이 인간을 영광스럽게 하는가?

 ④ 미래의 종교, ‘포스트 인본주의가 온다!



배경 읽기 : 인간, 신의 권능에 도전하다



*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에서 태어났다. 200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중세 역사와 전쟁 역사로, 거시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보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의 저작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는 인류학, 사회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작 <사피엔스>는 여러 인간 종 가운데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한 인간 종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이 지구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 책 <호모 데우스>에서는 마침내 세계를 정복하고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오르고자 하는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의 모습을 설명하고, 그들에게 ‘호모 데우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① 근대인본주의의 등장

중세까지 모든 권위의 원천은 신이었다. 신의 말씀이 곧 법이었고, 그 말을 전달하는 사람이 곧 당대의 제일가는 정치가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과학이 종교를 무너뜨렸다. 19세기의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고, 중세의 신민들과 달리 근대의 시민들은 권위의 원천이 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이 곧 세계의 중심이고 권위의 원천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인본주의라고 부른다.   


  

 ② 인본주의세계를 정복하다

인본주의가 등장하고 난 뒤, 더 이상 정치인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게 되었다. 정치인은 시민의 대표이기에 민주주의 투표로 선출하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더 이상 성경을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논리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종교전쟁은 더 이상 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펼치는 정의로운 전투가 아니게 되었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종교전쟁을 정의로운 싸움으로 묘사했지만, 근대의 예술가들은 그 폭력 속에서 무참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인간 개개인의 행복과 슬픔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인본주의는 그야말로 ‘근대판 종교’가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았다. 행복한 삶은 현실에서 이루어져야지, 죽은 뒤의 행복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겨졌다. 현실 속 인간의 삶이 나아져야 했기에,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었다. ‘기아, 역병, 전쟁’ 따위가 사라져야 인간의 삶이 나아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근대의 사람들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을 굶주림에서 해방시켰고 수많은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게 됐으며 큰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이룩해 나갔다.     



 ③ 호모 데우스를 창조하라!

물론 기아, 역병, 전쟁이 지구 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술과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그 걱정이 현저하게 사라졌다. 이처럼 '문명화된 나라'의 사람들은 이제 ‘불멸, 행복, 신성’이라는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간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올라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데우스’는 라틴어로 신을 의미한다. 


인간은 제3의 신을 창조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 스스로 제3의 신이 될 것인가? 그때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작품 해설_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렸다



① 인간 중심 종교인본주의 


잠깐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가 마치 밝음과 어둠처럼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과학과 종교를 서로 앙숙이거나 별개라고 믿는 것은, 우리가 종교를 지나치게 축소해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종교가 일종의 ‘도덕법 체계’라고 보고, 그것만이 인간의 사회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으로는 사람이 어떨 때 죽는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윤리적 판단은 과학이 내리지 못한다. 저자는 이처럼 윤리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 일종의 도덕법 체계가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말한다. 실제로 중세에는 신의 말씀을 담아놓은 책인 성경이 종교의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는 그 형태가 조금 바뀌었지만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입법기관, 사법기관, 행정기관이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종교의 윤리적 판단 기능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 뼘 더 읽기 1_  < 과학의 역할, 종교의 역할 >

사실을 진술하는 건 종교가 아닌 과학의 영역이다. 현대의 종교가 과학과 마찰을 일으키는 이유는 현대의 종교가 윤리적 판단만 하는 게 아니라 과학을 대신해 사실까지 진술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화는 거짓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창조과학을 가르쳐야 한다.”라는 주장이나 “인간의 생명은 수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낙태는 살인이나 다름없다,”라는 주장, “동성 간의 성관계나 동성 간에 성욕을 느끼는 일이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는 정신병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라는 주장.
이처럼 과학적 사실에 위배되는 종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것은 과학뿐이다. 즉, 과학과 종교 간에 서로 넘지 말아야 할 일종의 선이 있는 셈이다.


저자는 인본주의가 근대 이래로 가장 유행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본주의의 핵심 교의를 두 가지로 분리한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영혼 혹은 의식과 마음, 또는 우수한 지능을 가진 존재다’라는 사실적 진술(과학의 영역)과 ‘영혼 혹은 의식과 마음, 또는 우수한 지능을 가진 존재는 우월하다’라는 윤리적 판단(종교의 영역)이 그것이다. 인본주의는 이 두 가지 핵심 교의에 바탕을 두고, 인간이 곧 세계의 중심이며 권위의 원천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본주의라는 종교혁명’이 근대를 이끌어 온 원동력인 셈이다.


한 뼘 더 읽기 2_  < 민주주의는 종교다? >

민주주의를 어떻게 종교에 비유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종교는 ‘인간이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따라야 하는 어떤 도덕법 체계’를 의미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표가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라는 도덕법 체계, 즉 종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② 근대성은 과학과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이다


사람들은 근대를 과학과 종교 사이의 투쟁 과정으로 묘사하곤 한다. 반면 저자는 근대 이후의 과학이 껍데기만 간신히 남아 있는 중세의 종교와 투쟁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근대 이후의 사회를 살아가는 평균적인 시민이라면 법정에서 헌법 대신 종교의 경전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물론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이념의 광기에 휩싸여 폭력을 자행하고 있지만(아, 멀고도 험한 평균적인 시민의 삶!) 그 일부에 의해 세상이 중세로 회귀할 거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중세의 종교와 피 튀기는 전투를 치른 과학. 그 과학은 근대의 종교인 인본주의에 맞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중세의 종교에 저항했듯이 인본주의에도 저항하고 있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 종교즉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 과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그 교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과학을 이용한다.”    

 

근대의 과학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중심 세계관을 강화하며 인류에게 힘을 부여하려 한다. 그래서 저자는 근대를 과학과 인본주의 사이의 결합과정(계약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③ 무엇이 인간을 영광스럽게 하는가?


한 가지 끊임없는 의문이 인본주의를 괴롭힌다. 무엇이 인간만을 영광되게 하는가이 드넓은 세상에서 무엇이 인간만을 특별하게 하는가?’라는 의문 말이다. 그러면 인본주의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인간만이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의식과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우수한 지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현대 과학의 연구에 의하면 이런 믿음 대부분이 증명할 수 없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고 있다.



 i. 영혼


먼저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발견된 적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영혼의 존재가 진화론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진화론에 따르면 생물을 이루는 모든 구조는 끊임없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작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끊임없는 변화(결합과 분리) 가운데 생존에 적합한 것은 선택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도태되기 때문에 생물이 진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진화를 통해서 만들어질 수 없다. ‘변치 않는 영혼’이 진화를 통해 만들어질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영혼이 진화된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신이 사람에게 영혼을 불어넣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엔 영혼을 증명하기 위해 신의 존재까지 증명해야 한다.


 ii. 의식과 마음


한편 의식과 마음은 불가사의한 영혼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의식과 마음은 영혼과는 달리 우리가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과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다. 인간 존재를 초월하는 불멸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의식과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의식과 마음이 정말 존재할까 의문을 가지는 순간조차 우리는 자신이 의심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식과 마음이라는 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의식과 마음이라는 주관적 경험에는 기본적인 특징 두 가지가 있다. 감각과 욕망이 그것이다. 우리가 로봇과 컴퓨터에 의식이 없다고 말하는 건 그것이 수많은 능력을 갖췄음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원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배터리가 부족해 스스로 충전기를 찾아가는 로봇청소기는 배가 고파서(감각, 욕망) 그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설계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동물의 경우는 어떤가? 개는 배가 고파서 먹이를 먹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설계된 대로 움직이는 걸까?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 사람은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을까, 아니면 단순히 설계된 대로 움직이는 걸까?


우리는 아직까지 이 물음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 현대 과학이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은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반응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마음은 인간의 삶을 이루는 데 필수적인 데이터 처리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 졸리면 자는 것처럼) 정도다. 뇌 속의 전기와 화학물질의 흐름이 도대체 어떻게 고통이나 분노 또는 사랑 같은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 뼘 더 읽기 3_  < 의식에 대한 실험 사례 >

먼저 여러 사람을 거대한 뇌 스캐너에 넣고 양손에 스위치를 하나씩 쥐게 했다. 그리고 연구 대상에게 두 스위치 중 하나를 마음대로, 아무 때나 누르게 했다. 그동안 연구자는 뇌 스캐너를 통해 뇌신경 활성도를 관찰했다.
연구자는 연구 대상이 미처 행동하기도 전에, 심지어 어떤 스위치를 누를지 결정하기도 전에 연구 대상이 어떤 스위치를 누를지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 있었다. 연구 대상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영 점 몇 초 내지 몇 초 전에 뇌신경 활성이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 실험을 통해 선택이 먼저 뇌에서 일어나고 그 선택을 깨닫는 의식은 그다음에 온다는 결론을 도출했다('의식→선택' X / '선택→의식' O).
이 실험의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미리 뇌가 내린 결정’이고 우리는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이었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뿐이다.     


한 뼘 더 읽기 4_  < 우리의 욕망은 자유로운가? >

내 진정한 자아가 나 자신의 욕망을 선택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한 번 떠올려 보자.
다이어트를 결심한 날 오후 8시, 당신은 야식을 먹을지 그냥 잘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야식을 먹고 싶다는 욕망과 다이어트라는 욕망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 야식을 먹는 것과 다이어트를 위해 야식을 포기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진정한 자아에 의한 행동인가? 어떤 욕망이 승리했는가는 중요치 않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욕망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현대 과학으로는 ‘개나 로봇청소기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무언가를 욕망하지 못한다.’라는 주장 역시 증명할 수 없다. 우리에겐 ‘나 이외의 다른 존재’가 의식이나 마음을 지녔는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그 '다른 존재'가 사람일 경우에도 말이다. 개(로봇)가 먹이가 먹고 싶다는 감정(배터리를 충전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아마 개의 뇌(로봇의 CPU)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활동의 결과일 것이다. 이때 현대 과학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의식과 다른 것임을 증명할 수 없다. 결국 개(로봇)에게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가 의식을 뭐라고 정의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한 뼘 더 읽기 5_  < 의식에 관한 케임브리지 선언 >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의도적인 행동을 보이는 능력과 함께, 의식적 상태를 구성하는 신경해부학적・신경화학적・신경생리학적 기질들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만이 의식을 생성하는 신경 기질을 지닌 유일한 생물이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다.”     


 iii. 우수한 지능


다른 종보다 인간이 우수한 지능을 가졌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이 또한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이 지능의 우수함을 따지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간에 어떤 종이 우수한 지능을 가졌는지 판단할 수 있는 공평한 기준은 없다. 인간의 달리기 지능이 치타보다 뛰어날까? 인간의 나무 타기 지능이 원숭이보다 뛰어날까? 인간의 헤엄치기 지능이 물고기보다 뛰어날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능이 다른 동물이나 컴퓨터에게 부족하다고 해서 그들보다 사람이 우수한 지능을 가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약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수한 지능을 가졌다고 한들, 그것만으로는 인간이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만약 인간보다 모든 부분에서 우월한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그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인가? 인간보다 영광스러운 존재인가? 인간이 다른 생명을 대하듯, 그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해도 되는가?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무엇이 인간만을 영광되게 하는가이 드넓은 세상에서 무엇이 인간만을 특별하게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답해 보자. 위에서 살펴봤듯, 현대 과학의 연구결과는 인간이 특별하다는 인본주의의 기본 전제 자체를 부정한다. 인간이 곧 세계의 중심이고 권위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은 현대 과학에 의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미래의 종교, ‘포스트 인본주의가 온다!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새로운 과학은 항상 종교혁명의 불씨가 됐다. 중세와 근대 사이에 과학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본주의 종교혁명이 밀어닥쳤듯이 인간의 특별함(영광스러움)을 과학이 부정하는 순간 인본주의는 새로운 과학과 더 잘 어울리는 새로운 종교로 대체될 것이다. 그때 과연 어떤 종교가 탄생할 것인가? 저자는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교라는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i. 기술 인본주의


최신의 과학기술을 이용해 신의 권능에 도전할 수 있는 초인류 즉, ‘호모 데우스’를 창조하고자 하는 종교다. 언어를 발명하여 첫 번째 인지 혁명이 촉발되었듯, 현대 과학기술이 두 번째 인지 혁명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발상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인류는 이제 한계를 뛰어넘어 무한한 지능을 추구하고 그토록 신성시하던 인간의 감정과 욕망, 의식과 마음마저 통제하려 들 것이다.

     

이때 진보된 기술이 인간을 가치 있게 여길지는 미지수다. 인간을 초월한 지능을 가진 초인류가 탄생한다면 초인류는 인간을 동등하게 여길까 아니면 인류가 동물에게 그러했듯이 인류를 미개하다고 여길까? 돈이나 권력을 가진 일부 사람들만 초인류로 진화하고 대부분은 초인류에게 지배당하며 살아가게 되지는 않을까? 평범한 인간이 ‘인간 톱니바퀴’나 ‘특대형 개미’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초인류가 인간의 감정과 욕망, 의식과 마음을 제어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제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기뻐하거나, 웃으면서 자폭테러를 감행할지도 모른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행복한 꿈을 꾸며 캡슐 속의 배양액에 갇혀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으며 평생을 초인류의 노예처럼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제 삶의 이유라고 믿으며 궁극의 행복을 만끽하게 될지도 모른다. 

    

 ii. 데이터교


인간의 지식과 지혜보다 빅데이터와 컴퓨터 알고리즘을 신뢰하는 종교다. 데이터 흐름을 극대화하는 것, 그리고 만물을 컴퓨터 알고리즘에 연결하는 것이 데이터교의 가르침이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데이터고, 인간은 창조의 정점이 아니라 ‘만물 인터넷’을 창조하는 구성물일 뿐이다. 데이터교의 신자들은 무한한 정보의 자유를 추구한다. 그들은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은 거대한 데이터 흐름의 일부이며, 알고리즘은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신경 쓴다”라고 말한다. 만물 인터넷이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 믿는 것이다.


한 뼘 더 읽기 6_ < 정보의 자유 >

정보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처럼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보에 주어지는 자유를 말한다. 방금 우리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정보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 정보의 자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정보의 자유에 달려 있고, 열쇠는 데이터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데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개인의 사생활을 포함한 모든 정보를 시스템에 업로드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거대 시스템이 과연 인간의 삶을 정말로 나아지게 할지는 미지수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보편화된 새로운 세상을 마음껏 상상해보고 싶은 사람에겐,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 미러> 감상을 추천한다.     


미래의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어찌 됐든 미래 세계의 중심에 인간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과거에 기반을 둔 미래’를 예측함으로써 진짜 미래 즉, ‘현재에 기반을 둔 미래’를 새롭고 유익하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예측한 미래는 과거에 기반을 둔 미래다. 이 책을 읽으며 현재에 기반을 둔 미래를 어떻게 일구어나갈지 고민해보자.


미래는 과거의 우리가 아닌, 지금의 우리 손에 달렸다!




글_ 이준기 유레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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